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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동아투위를 알고 있는가

김종철 프로필 사진 김종철 2015년 10월 23일

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박정희 정권의 ‘언론인 대학살’ 이제라도 사죄하라


지금부터 꼭 41년 전인 1974년 10월 24일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언론탄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이 그날 아침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상황은 참으로 끔찍했다. 그해 4월 초에 중앙정보부가 살인적 고문과 협박을 통해 ‘민청학련’과 ‘인혁당’이라는 조직을 ‘반국가단체’로 조작해서 2백여명을 구속했는데도 언론은 그 실상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긴급조치가 언론에 완전히 재갈을 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운 것은 긴급조치뿐이 아니었다. 권력의 비위를 거스르는 기사를 내보내면 작성자인 기자는 물론이고 편집국장까지 ‘남산’이라고 불리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바로 그런 시기에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이 ‘사생결단’의 각오로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은 독재자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던진 비수나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의 3선 개헌 이전부터 전국의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에 속칭 ‘기관원’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그 중심에 있었고 보안사, 치안국, 서울시경뿐 아니라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까지 수시로 언론인들을 감시했다. 1974년 10월 당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동아일보사에는 방이라는 성을 가진 중앙정보부 간부가 아침부터 편집국에 ‘출근’해서 정치부나 편집부 데스크 옆에서 기사를 일일이 ‘점검’하는가 하면 모든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집국장에게 “이 기사는 빼고 이 기사나 논평은 줄여달라”고 사실상의 지시를 하고 있었다. 언론인들에게 그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이 그 문제를 공식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에는 이런 구절이 담겨 있었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 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그 선언이 발표되자 동아일보사에 출입하던 ‘기관원’은 당장 꼬리를 사리고 회사 부근을 서성거릴 뿐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언론인들이 유신독재가 저지른 야만적 인권탄압과 민중 억압에 관한 보도와 논평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자 박정희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1974년 12월 하순부터 광고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불법행위는 민중의 격려광고라는, 세계 언론사상 일찍이 없었던 저항운동을 촉발했다. 그러자 체제의 존립이 위험하다고 본 박 정권은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 경영진과 야합해서 폭력배 2백여명을 동원해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13명을 거리로 몰아냈다. 그들이 바로 그날 결성한 조직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이다.


어느 날 갑자기 ‘거리의 언론인’이 된 동아투위 구성원 다수는 박정희 생시에 취업 방해에 시달리는가 여권조차 발급받지 못했다. 가장 비통한 것은 113명 가운데 지난 40년 동안 20명이 고문 후유증, 옥고, 난치병, 생활고, 스트레스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과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야합해서 저지른 ‘간접 살인’임이 분명하다. 동아투위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해직 무효 소송을 비롯해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등을 제기했으나 ‘사법정의’는 언제나 독재정권의 편이었다.


박근혜는 1974년 8월 15일 어머니 육영수가 국립극장에서 총탄에 맞아 숨진 뒤부터 공식적으로 ‘청와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보좌관이나 비서들을 통해 1975년 3월 17일의 ‘언론인 대학살’에 관한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그는 2012년 대통령선거 기간에 “과거를 청산하고 100퍼센트 국민 대통합을 이루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동아투위도 당연히 그 ‘100퍼센트’ 안에 들어가는데도 박근혜는 “언론인 대학살’의 진상을 조사하고 그것이 진실로 밝혀진다면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겠다”고 동아투위에 알려온 사실이 전혀 없다. 하기야 재심을 통해 인혁당 사건 8명에 대한 1975년의 사형 판결이 ‘사법살인’임이 명백히 확인되었는데도 단 한 마디 사과도 없는 박근혜가 아닌가?


박근혜는 지금 ‘대통합’은커녕 주권자인 국민들을 사상적으로 전체주의의 감옥에 가두려 들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이 바로 그런 공작의 일환이다. 아버지 박정희의 친일반민족행위, 5·16 군사쿠데타, ‘10월 유신’이라는 이름의 헌정쿠데타를 미화하거나 왜곡하는 일을 넘어 중고등학생 시기부터 파시즘적 역사 교육을 강요하는 히틀러 식 세뇌작업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무모한 ‘기획’이 성공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박근혜는 막무가내이다. 지성, 이성, 덕성, 예의, 염치 같은 말들이 그에게는 외계인의 미덕처럼 보이기 때문일까?


동아투위는 자유언론실천선언 41주년을 맞아 고인 20분의 영정 앞에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다. 그분들의 간절한 염원은 나라의 민주화와 겨레의 통일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면서 유신독재 시대로 뒷걸음치고 있다. 주권자들이 중심이 되는 민주·통일운동이 자유언론과 공정방송의 뒷받침으로 열매를 맺을 때 그분들의 영혼이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