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파괴한 박근혜가 헌정 지킬 수 있나

-‘하야’ ‘탄핵’ 외치는 민심과 동떨어진 민주당과 국민의당

10월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최순실 게이트’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의 ‘정치적 쇼’와 ‘양동작전’에 휩싸였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지난 29일 오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안종범과 부속실 비서관 정호성의 자택을 동시에 압수수색한 뒤 그들의 청와대 사무실에도 같은 조치를 하겠다는 취지의 영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불승인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그것을 거부했다. 검찰이 청와대와 대치 중이라는 보도를 본 사람들은 검찰이 평소 ‘지존’으로 모시던 대통령 박근혜를 겨냥해 칼을 휘두른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검찰이 이튿날인 30일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최순실이 런던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전 7시 35분에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했는데도 신병을 확보하지 않고 하루 동안 소환을 미뤄 달라는 그의 부탁을 선뜻 들어준 것이다. 경향신문은 검찰 직원 5~6명이 공항에서 최순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헌정 사상 최악의 ‘국사범’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셀 수도 없이 많이 드러난 당사자인데도 검찰이 그렇게 융숭한 대접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최순실의 난데없는 귀국은 그 자신과 ‘숨은 권력’의 합작이라는 인상을 짙게 풍겼다. 그는 지난 25일 독일 헤센주의 한 호텔에서 세계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현재 비행기를 탈 수 없을 정도로 신경쇠약에 걸려 있고 심장이 굉장히 안 좋아 병원 치료를 받고 있어서 돌아갈 상황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면서 최순실은 “저는 오늘도 약을 먹고 죽을 수 있다.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지금 너무 지쳤다”고 말했다. 그런데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서 한 시민에게 찍힌 영상을 보면 그의 얼굴도 걸음걸이도 병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검찰은 증거 인멸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그를 체포해 적어도 48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조사를 했어야 마땅하다.

최순실이 입국하기 바로 전날인 29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 모인 3만여 군중은 ‘박근혜 퇴진’과 ‘탄핵’을 소리 높여 외쳤다. 최순실 게이트의 몸통은 박근혜라거나, 박근혜가 최순실이라는 ‘사교(邪敎) 교주’에게 영육이 팔려 헌정을 파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비판의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야당인 민주당과 국민의당에서는 퇴진 또는 사퇴를 주장하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청계광장 집회에 참석한 민주당원 이재명(성남시장)이 이렇게 말한 것이 거의 유일하고도 가장 강력한 요구였다.

누군가의 한마디에 전쟁도 계엄도 불사할 수 있을 대통령···대통령의 퇴진이 진실 규명보다 더 화급한 일이 되었습니다.

민주당 대표 추미애는 지난 30일 긴급 최고위원회 간담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헌정을 파괴하고 헌법상 권리를 사교 교주 최순실 씨에게 헌납해온 지 4년이 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이 국면은 국권을 파괴하고 헌정 질서를 교란시킨 대통령이 문제의 본질이고 책임자다.

박근혜가 그렇게 엄청난 헌정 파괴 행위를 저질렀다면 민주당이 앞장서서 사퇴를 요구하거나 탄핵소추안을 발의해야 옳지 않은가?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박지원은 지난 2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우리가 재야, 시민단체, 학생들이나 일부 흥분한 국민처럼 탄핵과 하야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며 “최소한 국민은 헌정 중단을 바라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틀 뒤 청계광장에 모인 주권자 3만여 명은 ‘흥분’을 못 이겨 ‘탄핵’과 ‘하야’를 외쳤단 말인가?

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대권 주자’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의원들도 내년 대통령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계산 때문에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와 사퇴 요구를 입 밖에 내지 않고 있다는 비판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2004년 ‘노무현 탄핵’의 경우처럼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큰 데다 국회에서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은 노무현보다 엄청나게 많은 ‘탄핵 사유’를 안고 있는 박근혜를 상대로 제기한 탄핵소추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권자들에게 그 정당성을 입증해 보이는 일 자체만으로도 생산적 정치의 진수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헌정을 파괴한 박근혜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것은 국민의 대표이자 헌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의 당연한 책무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그동안 마이동풍으로 넘기던 청와대 인사 개편을 30일에 실시했다. 비서실장 이원종, 민정수석 우병우, 정책조정수석 안종범, 정무수석 김재원, 홍보수석 김성우, 그리고 ‘문고리 3인방’이라고 불리는 비서관 정호성, 이재만, 안봉근의 사표를 수리한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 정연국은 그들이 왜 물러나야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은 채 “대통령께서는 현 상황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시고 각계의 인적 쇄신 요구에 신속하게 부응하기 위해 대통령 비서실 인사를 단행하기로 하셨다”고 말했다. 박근혜가 이런 식으로 ‘인적 쇄신’을 한다고 해서 망가진 헌정이 되살아날 수 있을까?

민주당과 국민의당에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교훈을 다시 상기시키고 싶다. 1960년의 4월 혁명은 헌정 파괴와 부정선거를 일삼던 독재자 이승만을 타도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일으킨 대사건이었다. 신파와 구파로 갈려 정쟁을 일삼던 민주당 대신 민중이 역사를 바꾼 것이었다. 1987년의 6월항쟁 역시 학생, 노동자, 농민, 종교인, 넥타이부대, 문화예술인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전두환 군사독재의 장기집권 음모를 깨부순 쾌거였다. ‘대권 경쟁’에 몰두하던 정치지도자들이 주도한 항쟁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헌정을 파괴한 박근혜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거나 탄핵하라는 주권자들의 함성으로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다. 전국의 대도시들은 물론이고 중소도시들까지도 그 운동이 급속히 퍼져 나가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이런 현상을 허투루 보지 말아야 한다. ‘이대로 가면 박근혜 정권이 빈사 상태에 이르고 새누리당도 자중지란에 빠져 내년의 정권교체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다. 주권자들의 믿음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과감하게 투쟁을 하지도 않고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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