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진보적 보수’ 반기문

-정권교체 아닌 정치교체 하겠다는 궤변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지난 12일 귀국한 반기문의 ‘정치 어록’이 언론매체들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는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던 도중 “진보주의자인가 보수주의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수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대한민국 지도자들 중에서 나처럼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이는 별로 없다. 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다.” 네이버, 다음, 구글을 비롯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보아도 한국의 정치인들 가운데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한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반기문이 한국 최초인 셈이다. 도대체 반기문은 진보와 보수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적 의미를 제대로나 알고 ‘보수적 진보주의자’라고 서슴지 않고 ‘선언’한 것인가?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인 진보주의는 과학, 과학기술, 경제 발전, 그리고 사회 조직의 발달이 인간의 생활조건들을 개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 사상이다. 보수주의는 문화와 문명이라는 맥락에서 전통적 사회제도 보존을 추구한다. 2014년 12월 초순에 세상을 떠난 경제학자 김기원은 사망하기 두 달 남짓 전에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진보와 보수, 상식과 몰상식’)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진보파는 사회연대(공생), 경제적 평등, 분배, 민주성, 정치적 자유를 강조”하는 반면 사회적 강자를 대변하는 보수파는 “자기책임(경쟁), 경제적 자유, 성장, 효율성, 정치적 질서를 강조한다”고 규정했다. 진보와 보수에 관한 이런 정의가 타당하다고 보면, 반기문은 진보가 아니고, 어정쩡한 보수에 속할 뿐이다.

현대에 들어 한국사회는 일제강점기의 식민지배,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 1961년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18년에 걸친 전체주의적 공포정치, 인권유린, 그리고 경제적 수탈을 경험했다. 1980년 5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의 집권 13년도 박정희 정권의 판박이였다. 2008년 2월부터 현재까지 9년 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국가를 사조직화하면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름으로써 ‘헬조선’이라는 수치스러운 유행어를 빚어냈다. 이렇게 오랜 기간의 고통과 질곡 속에서 진정한 ‘진보주의자’라면 민주화와 민족의 평화공존을 위한 운동에 분연히 앞장서야 했다. 그런데 반기문은 1970년에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뒤 47년 동안 단 하루도 그런 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고 독재정권을 비판하지도 않았다. 이런 인물이 ‘진보적으로 사고한다’고 주장하면 누가 ‘오, 그러냐’고 시인하겠는가? 차라리 ‘합리적이고 건강한 보수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말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지난 12일 저녁 인천공항에 내린 반기문은 기자회견을 열고 장문의 ‘귀국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 내용 가운데 가장 어이없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정권을 누가 잡느냐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다 대한민국, 한 나라, 한 민족입니다. 정쟁으로 나라와 사회가 더 분열되는 것은 민족적 재앙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때가 아닙니다. 정권교체가 아니라 정치교체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제 ‘폐족’이 되다시피 한 새누리당 ‘친박계’ 중의 아무개가 정권을 잡아도 나라와 민족의 앞날에 아무런 악영향이 없으리라는 뜻인가? 아무나 정권을 잡아도 그만이라면서 반기문 자신은 왜 갖은 ‘정치적 쇼’를 펼치면서 ‘충청 대망론’에 편승하려 드는가? 그리고 그가 말하는 ‘정치교체’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정치를 바꾼다’는 의미 같은데, 지금까지 정치를 해온 사람들은 모두 썩었으니 자신을 중심으로 정계 개편을 해야 한다는 말일까? 이렇다 할 조직도 없고 이제 막 ‘마포팀’이라는 캠프를 꾸린 그가 무슨 힘으로 단숨에 정치 혁신이나 개혁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 캠프에 참여한 면면을 보면 반기문처럼 외교관으로서 권력에 순종해온 관료들과 새누리당을 떠났거나 아직도 남아 있는 ‘꼴보수들’, 그리고 이명박 정권의 핵심으로 일하던 낡고 퇴행적인 인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정치교체가 아니라 정치 후진화를 위한 모임처럼 보인다.

반기문은 ‘귀국 메시지’에서 “국민 대통합을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며 “패권과 기득권은 더 이상 안된다”고 주장했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100% 국민 대통합’을 외친 뒤 임기 4년이 채 못 되어 지지율 4%의 식물대통령으로 전락한 사실을 반기문은 ‘남의 일’로 보고 있는 듯하다. 한때 ‘박근혜 아바타’라고 불리던 사실을 그는 벌써 잊었는가? 패권과 기득권에 관해서도 반기문은 다른 정치인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 그는 지난해에, 지역주의에 편승해 패권을 추구하던 김종필을 비롯한 낡은 인물들을 ‘예방’하는 일에 몰두한 바 있다. 그리고 그가 정치적 상표로 활용하고 있는 ‘세계의 대통령 유엔 사무총장’도 기득권이 아니고 무엇인가?

반기문이 합리적이고 건강한 보수라도 되려면 절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었다. 그의 고향인 충북에서 그를 ‘우상화’한 일련의 사업들이 바로 그것이다. 반기문이 유소년 시절을 보낸 충주시는 그가 2007년 유엔 사무총장이 된 뒤 국비와 민자 등 2,700억여 원을 들여 금릉동의 63만4,000평방미터에 ‘유엔평화공원’을 조성했다. 충주시와 ‘반기문 마케팅’ 경쟁을 벌인 그의 고향 음성군은 생가를 복원해 ‘반선재(반기문의 착한 집)’라는 이름을 붙이고, 바로 옆에 반기문평화랜드를, 거기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유엔반기문기념광장을 조성했다. 생가 복원에 15억 원, 평화랜드 조성에 20억 원이 들었는데 내년까지 125억 원을 투입해 생가 옆에 유엔평화관을 지을 계획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반기문은 한 지역에서 우상화된 인물로는 박정희에 필적할 만하다. 박정희 우상화가 사후에 본격적으로 추진된 데 반해 반기문 우상화는 생전에 극에 이르렀다. 반기문은 여태까지 은근히 그것을 즐겼을 테지만, 그의 대선 출마가 기정사실이 된 뒤 우상화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최근 반기문은 ‘박연차로부터 23만 달러를 받은 의혹’에 관해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고, 뉴욕 검찰이 동생 반기성과 조카 반주현을 거액의 뇌물 혐의로 기소한 사건을 두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언론과 주권자들은 그가 혹독한 검증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반기문이 험난한 가시밭길과 지뢰밭을 지나 ‘정권교체’가 아닌 ‘정치교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아니면 중도에 낙마할지를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함께 실립니다.

  • 이동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사람이 욕심은 끝이 없다라는 걸 단적으로 아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반 기문이라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욕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안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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