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구속까지 25년 걸렸다

-유신독재·신유신체제 부역자 응징은 이제부터 시작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지난 21일 구속된 전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이 22일 특검에 소환됐다. 수갑을 찬 채 굳은 얼굴로 특검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특히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반국가단체 또는 간첩단 사건 조작으로 사형을 당한 이들의 유족은 수십년 동안 가슴속에 쌓여 있던 원한과 분노가 더욱 뜨겁게 끓어오름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만행의 중심에 김기춘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2년 12월 중순에 구속되었어야 마땅하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부산 초원복국집 사건’ 때문이다. 그달 18일에 치러질 14대 대통령선거를 사흘 앞둔 15일 통일국민당 후보 정주영(현대그룹 회장) 진영은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전 법무부장관 김기춘이 12월 11일 부산 대연동의 초원복국식당에 부산 시장과 지검장, 경찰청장, 안기부 지부장, 기무부대장, 교육감, 상공회의소 회장을 불러 모아 놓은 자리에서 여당(민주자유당) 후보인 김영삼 당선을 위해 부정선거운동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었다. 통일국민당이 밝힌 ‘녹취록’에는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기춘의 발언 요지는 아래와 같다.

“부산·영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나 정주영이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 (···) 잘못 되면 혁명적 상황이 와서 전부 끌려들어가야 할 판인데 여당 해야지 그럼 어떡하나? (···)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 강 (상공회의소) 회장, 좀 한 번 바쁘더라도 편집국장, 사회부장, 정치부장, 이런 놈들 뭐 (돈) 주면서, 돈 걷어 뭐 할래요? 명세서 끊어주면서, 이게 운동이라.”

부산시의 행정·정보수사·교육·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들에게 김기춘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부추긴 것은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었다. 당시 대통령선거법에는 “누구든지 선거운동 기간 중 정당 또는 후보자를 지지 추천하거나 반대하는 선전행위를 이 법에 규정된 이외의 방법으로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민자당과 보수언론은 현행범인 김기춘을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녹취록을 폭로한 통일국민당을 거세게 공격했다. 공격의 최일선에는 조선일보가 나섰다. 그 신문은 부산 기관장 비밀모임과 녹취록의 실상은 조그맣게 보도하면서 노태우 정권이 그 모임에 참석한 일부 기관장 4명을 ‘전격 경질’한 일과 ‘엄중 문책 요청: 김영삼 후보’ 같은 내용을 주요 기사로 내보냈다. 게다가 집권세력과 조선일보는 비밀모임에서 김영삼 당선을 위한 부정선거 논의를 한 사실보다는 그 내용을 도청한 국민당의 ‘부도덕함’을 더 부각시켰다. 이런 ‘공작’에 힘입어 부산·경남은 물론이고 대구·경북에서도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김영삼 지지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김영삼은 득표율 42.0%(997만여표)로 김대중(33.8%, 804만여표)과 정주영(16.3%)을 압도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선이 끝난 뒤인 12월 29일 검찰은 김기춘을 불구속 기소했다. 그는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인 1993년 3월 “선거운동원이 아닌 자의 선거운동을 규정한 구 대통령선거법 제36조는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어 위헌”이라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제청을 했다. 헌재가 1994년 여름 그 조항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김기춘에 대한 재판은 공소 취소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만약 그때 헌재가 ‘기각’ 결정을 내렸다면 김기춘은 유죄를 선고 받았을 것이다. 그는 김영삼 ‘압승’의 ‘일등공신’이 되어 구속을 면한 뒤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지내고 2013년 청와대 비서실장이 되어 ‘법 미꾸라지’, ‘법의 지배자’, 심지어는 ‘법마(法魔)’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법 위에서, 법 밖에서 갖은 전횡을 일삼다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결국 구속되고 말았다. 법이 그를 쇠창살 안에 가두기까지 무려 25년이 흐른 것이다.

김기춘의 ‘출세가도’는 1972년에 활짝 열렸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이른바 ‘10월 유신’이라는 헌정쿠데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신헌법’ 초안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33세의 검사 김기춘을 ‘발탁’했던 것이다. 유신헌법은 ‘체육관의 거수기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 등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지명하게 하는 파쇼적 통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일을 계기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게 된 김기춘은 동기 검사들보다 훨씬 빨리 승진하면서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에 임명되었다. 대공수사국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고문과 강제자백을 통해  ‘반국가단체 조작’을 일삼는가 하면 ‘간첩단 사건’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무소불위’의 조직이었다. 김기춘이 실질적으로 지휘한 것으로 알려진 대공수사국이 1974년에 조작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최고 사형까지 선고받았지만 2000년대의 민주정부 시기에 대법원의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88년 12월에 검찰총장이 된 김기춘은 2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다가 1991년 5월 사상 최연소로 법무부장관에 임명되어 이듬해 10월까지 일했다. 그가 법무부장관을 맡고 있던 1년 반 남짓 동안에 노 정권의  ‘공안통치’는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1991년 5월의 ‘분신 정국’에서 검찰이 발표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김기춘이 주도한 대표적 공안사건인데, 대법원은 2015년 5월 재심에서 그것이 조작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972년부터 79년까지 7년 동안 박정희를 ‘주군’으로 섬기던 김기춘은 34년 뒤에 박근혜가 기도하는 ‘신유신체제 구축’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그는 비선실세인 최순실과 더불어 결국 박근혜의 정치적 파멸을 이끌어내는 결정적 구실을 하고 말았다.

김기춘을 특검이 구속한 것은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박근혜의 신유신체제  부역자들에 대한 응징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특검이 ‘박근혜의 남자’ 김기춘과 ‘박근혜의 여자’ 조윤선을 동시에 감옥으로 보냄으로써 신유신체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이변이 없는 한 박근혜가 가까운 시일 안에 탄핵을 당하면 60일 안에 대선이 실시되어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그 정부가 진정한 민주·평화체제를 세우려면 유신독재와 신유신체제 부역자들을 철저히 가려내어 엄정하게 응징해야 할 것이다.

김기춘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다. 서울 독립문 부근에 있던 서대문구치소가 그곳으로 옮겨가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김기춘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을 지휘하던 1975년 4월 9일 새벽 서대문구치소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전날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인혁당 사건 피고인 8명이 불과 18시간 만에  교수형을 당한 바로 그 일 말이다. 국제법학자협회는 그 날을 ‘사법사상 최악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김기춘이 독방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기라도 한다면 여생에 한 줄기 빛이라도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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