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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2017년 06월 07일
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장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6월 6일은 제62회 현충일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TV로 생중계 되는 현충일 추념식 행사를 아예 외면하다시피 하고 살았다. ‘전과 14범’으로서 ‘뼛속까지 친일’(형 이상득의 말)인 이명박이 ‘애국·애족’ ‘조국에 몸 바친 용사들’ 운운하는 말을 참고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자 유신독재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아버지의 반민족·반민주행위들에 대해 단 한마디 사죄도 하지 않은 채 현충일을 맞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순국한 열사들’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새 대통령 문재인은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오전 10시에 TV를 켰다. 그의 ‘추념사’는 역사 인식이나 ‘애국’에 대한 개념이 이명박·박근혜와는 천양지차였다. 그는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한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겠다”면서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기보다 전쟁의 경험을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이념의 정치, 편 가르기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다짐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좌우가 없었고 국가를 수호하는 데 노소가 없었듯이, 모든 애국의 역사 한복판에는 국민이 있었을 뿐”이라는 말은 국민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민족 통합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문재인은 친일파의 후손들이 8·15 이래 70년이 넘도록 ‘득세’해온 현실을 이렇게 비판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국가의 예우를 받기까지는 해방이 되고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뒤집힌 현실은 여전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가난의 서러움, 교육받지 못한 억울함, 그 부끄럽고 죄송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문재인은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는 드물게 여성노동자들을 ‘애국자’라고 찬양했다.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번 현충일 추념식은 탁월한 공연 기획가가 연출한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고위 관리들보다는 ‘상이군인들’을 대통령 옆자리에 앉히는 배려가 특히 돋보였다. 가수 장사익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부른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테너 카이와 뮤지컬 배우 정선아가 함께 노래한 ‘조국을 위하여’는 행사 참석자들은 물론이고 TV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다. 배우 이보영이 낭송한 추모헌시 ‘넋은 별이 되고’의 한 구절을 들으며 유족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바람소리에도 행여 임일까 문지방 황급히 넘던 눈물 많은 아내의 남편이었는데
기억하지 못할 얼굴 어린 자식 가슴에 새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희미해진 딸의 아버지였는데
무슨 일로 당신은 소식이 없으십니까.
이 시에 나오는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난 청년일 수도 있고, 베트남전쟁에 ‘총알받이’로 나간 군인일 수도 있다.
나는 ‘이번 현충일 행사의 기획자는 최초의 여성 보훈처장 피우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박근혜의 ‘심중’을 헤아려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가로막던 박승춘이 떠난 자리에 앉은 예비역 육군 중령이 상투적인 현충일 추념식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본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이번 행사에서는 광화문광장의 촛불집회에서 끓어오르던 열기, 화합의 메아리와는 또 다른 동포애와 온기가 짙게 배어나고 있었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