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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찾아서

도도 프로필 사진 도도 2015년 05월 19일

중심의 변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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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간 중, 영어는 내가 생존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숙소 예약, 음식 주문, 항공편 지연, 여행 안내는 물론이고 룸메이트와의 대화도 모두 영어로 했다. 여러 나라 사람을 만났지만 나와 그들간 의사소통의 접점은 영어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가 여행한 곳 가운데 영어권 국가가 하나도 없었다는 데 있다. 그들은 모두 자국어를 따로 갖고 있었다.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핀란드어, 아이슬란드어, 이탈리아어가 모두 따로 있다. 한국 대학에 관련학과가 설치되어 있거나 제2외국어 등으로 그나마 접하기 쉬운 언어라고 해봐야 프랑스어 정도지만 나는 불어를 공부한 적이 없었다.

여행지의 언어를 잘 알고 갔다면 여러모로 좋았을 것이다.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의 폭이 넓어지고 현지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편하다. 그래서 이전, 체코에 갔을 때 야심차게 여행회화집을 사서 들고 갔다. 사실 여행지에서 생존에 필요한 질문과 대답은 한정적이다. 길을 묻고 체크아웃 시간을 알아듣고 음식을 주문하고 입국장에서 내 여정을 설명할 수 있으면 된다. 내가 회화집에 나온 내용을 모조리 외웠다면 현지어로 이 상황을 풀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끝내 회화집에서 단 한 마디의 체코어도 꺼내지 못했다. 내가 책을 보고 질문은 할 수 있겠지만 그 다음은 대책이 없었다. 내 말을 들은 그들이 뭔가 대답을 할 텐데, 그들이 하는 말이 그대로 회화집에 들어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고, 설령 있다한들 그들의 대답을 내가 책에서 찾아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완전히 다른 발음 체계를 기반으로 한 그들의 말을 내가 듣고 기억할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영어로 말을 걸면 그들은 나에게 영어로 답을 해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도 유럽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이 일이 지속되다보니 나는 유럽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차마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못했으나 어느 순간 영어를 못하는 직원이 자국어로 친절하게 나에게 무언가 안내를 할 때 갑자기 짜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놀랐다. 내 제1외국어인 영어로 여러 서비스를 받기 시작하고 또 그게 반복되면서 그들의 모어가 아닌 영어를 내게 사용하는 친절이 기본인 줄 착각했다.

나에게는 길을 묻는 사람이 많다. 길을 지나다보면 가끔 외국인이 내게 길을 묻기도 하는데 이 때 나도 그들의 영어가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외국인이 내게 길을 물을 때는 늘 영어로 길을 물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인 일본인이나 중국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 스스로 한국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으면서도 비영어권인 나라에서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내가 여행지에서 영어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점은 국제어로서 영어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는 여행지에서 한국어를 쓰는 것은 아예 포기했지만 영어의 권력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만약 내가 영어를 전혀 몰랐다면 여행지에서 여러 난처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외국에서 잠시라도 지내려면 영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한 달을 여행하면서도 단순한 한국어 맞춤법이 헷갈렸고 영어는 늘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오고서는 영어를 잊어가고 있다. 그러나 다시 영어가 생존 문제와 직결되는 상황이 오면 나는 다시 영어에 익숙해질 것을 확신한다. 언어는 결국 적응의 문제다. 필요에 의해 사용하면 자연히 늘고 그렇지 않으면 퇴화한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나는 영어의 권력을 이용하는 쪽에서 굴종하는 입장이 되었다. 영어를 못하면 취업 시장에서 운신의 폭이 크게 줄어든다. 막상 일하면서는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입사나 승진을 위해서는 영어 성적이 필요한 기묘한 풍경이 연출된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면서 일할 사람에게 늘 영어에 능숙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셈이다. 한국에서 한국어만으로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데도 각 개인은 스펙을 이유로 영어를 쓰는 환경에 스스로를 노출시켜야 한다. 여기에 투입되는 개인적, 사회적 기회 비용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소모적인 일이다.

유럽에서나 한국에서나 내게 영어는 늘 고민이지만 고민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소모적인 대열에 편승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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