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평해전"이 슬픈 진짜 이유

최광희 프로필 사진 최광희 2015년 06월 02일

영화평론가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모든 이들은 죽고, 따라서 개개인의 죽음은 등가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에도 차등이 있다. 슬프게도 그렇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기아로 죽은 한 살배기 아기를 우리는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의 죽음은 기억한다. 어처구니없게도 찬 바다에 목숨을 빼앗긴 295명의 세월호 승객과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9명을, 우리는 기억한다. 죽음의 의미는 산 자들이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는 산 자들이 어떤 시대를 살아가고 있느냐의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명하게도, 산 자들의 세계에서 죽음은 분명한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다.


6월 10일 개봉을 앞둔 <연평해전>은 한일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벌어진 남북 해군 간의 교전 상황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전투에서 윤영하 당시 대위를 비롯한 여섯 명의 젊은 목숨이 희생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안타깝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영화 <연평해전>의 연출 포커스도 그런 정서에 맞춰져 있다. 영화는 희생자들 가운데 참수리 고속정 357호의 윤영하 대위와 조타장 한상국 하사, 의무병 박동혁 상병의 사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 모두 그저 평범한 젊은이들이며, 그저 순박한 군인들이다. 그리고 서로를 챙겨주는 살가운 인간들이다. 그걸 장황하게 펼쳐 놓는 전반부는, 관객들이 저들이 희생자들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고도 남는다.


과연, 북한의 기습 함포 공격이 있는 뒤 벌어지는 치열한 교전 상황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목숨을 잃는다. 국방부가 발표한 실제 교전 시간은 25분이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교전은 대략 한 시간 가까이 된다. 그만큼 교전 상황의 절박함을 드라마틱하게 재연하는 데 연출 역량을 집중한 결과다. 영화는 윤영하 대위가 치명적인 부상 상황에서도 지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상황과 한상국 하사가 조타장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중상을 입고도 키를 놓지 않는 상황, 의무병 박동혁 상병이 다친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긴박감 넘치게 포착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순간에 해군의 지휘부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있되 존재하지 않는 것은, 공군의 전투기가 뜨고, 근처에 있던 다른 고속정과 초계함이 상황의 절박감을 교신하지만 아무 행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참수리 357호의 영웅적인 죽음을 일부러 지켜보려고 작심한 듯. 만약 사실이 그러했다면 군의 무능이고, 연출이라면 왜곡이다. 희생자들의 죽음에 의미 부여를 하려는 욕심이 과한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생략해 버리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연출 방식이다. 처음부터 희생자들이 얼마나 드라마틱하게 숨져 갔는지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으니 다른 모든 실제 상황은 그저 장식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필 이 시대에, 그러니까 보수와 냉전 이데올로기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이 시대에 서해 교전, 또는 제 2연평해전이 소환되는 것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물론 그들은 분단의 억울한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들에게 휴머니즘의 재연 장치를 동원한 뒤 애국자의 휘장을 두른다. 냉전적 태도가 이 시대의 누군가에게 더 유리하고 더 편리한지, 그 맥락을 살피면 이 영화의 시대적 맥락도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세 번 슬펐다. 분단 현실 속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젊은 목숨 앞에 슬펐고, 그 죽음마저 냉전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어떤 세력의 뻔한 야욕이 읽혀서 슬펐다. 그리고 그 야욕이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종북 운운하는 이들의 인면수심과 같은 맥락이라는 게 또 한 번 슬펐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연평해전을 소환하는 것은 순수한 것이라고 우기는 그들의 존재가 슬펐다. 우리가 강요받는 “애국”은 여전히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를 증오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