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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과 미디어의 선동

최광희 프로필 사진 최광희 2015년 11월 17일

영화평론가

11월 18일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 <헝거게임>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리즈다. 판타지와 SF의 중간쯤에 걸쳐 있는 이 시리즈는 특히나 선동 매체로서 미디어의 역할을 우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헝거게임> 시리즈는 ‘판엠’이라는 독재국가를 설정한다. 스노우(도널드 서덜랜드)라는 독재자가 통치하는 이 나라는 12개 구역에서 남녀 한 쌍씩을 뽑아 첨단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 공간, 즉 ‘아레나’에 가둔 뒤, 참가자들끼리 서로를 죽이게 하는 ‘헝거게임’을 개최한다. 이 잔인한 게임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수십 년전 스노우의 독재에 반란을 일으킨 판엠의 피지배층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이자 본보기이며, 또 하나는 판엠의 수도 ‘캐피톨’에 모여 사는 지배층 시민들에게 짜릿한 오락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콜로세움에 모여 검투사들의 살육전을 지켜보던 로마 시민들처럼 아레나에서 잔뜩 공포에 휩싸인 참가자들이 살기 위해 다른 이를 죽이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시청하며 열광한다.


여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 분)도 12구역에서 뽑혀 나온 참가자 중 한 명이다. 처음부터 이 게임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한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연출한다. ‘동맹’을 만들어 서바이벌 게임의 룰을 거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맹의 결과, 캣니스는 그의 몇 명의 동료와 함께 살아남는다. 대신 판엠의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히지만, 동시에 캣니스의 동맹 전략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다. 특히 그녀는 자신도 그 존재를 몰랐던 반란군과 억눌려 지냈던 12개 구역의 민중들에게 혁명의 상징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모킹제이’라는 별칭을 얻은 캣니스는 이제 반란군에 가담해 스노우에 대항한 혁명전쟁에 참여한다.


여기까지가 미처 영화를 보지 못했던 분들을 위한 기둥 줄거리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한 부분은, 독재국가 판엠과 반란군 모두 캣니스를 서로 상반된 목적의 미디어에 활용한다는 것이다. 판엠이 헝거게임을 생중계하는 것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정글 법칙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캣니스는 이 미디어의 목적을 거부함으로써 혁명의 상징으로 고양되며, 반란군에 넘어간 그녀는 이제 반란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홍보 영상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판엠과 반란군에게 모두 미디어를 장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판엠은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반란의 가혹한 대가를 보여주길 원하며, 반란군 역시 굴하지 않는 저항 정신이 살아 있음을 확신시키기를 원한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도 있겠다. 반란군이 캣니스를 활용해 12개 구역 사람들에게 저항 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 ‘선동’이라면, 판엠이 벌이는 헝거게임은 선동일까, 선동이 아닐까. 사실 두 가지 모두 선동이다. 우리가 선동이라는 단어에 거부 반응을 느끼게끔 학습되었을 뿐이지,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메시지는 기본적으로 선동의 행위다. 단지 화법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판엠의 ‘헝거게임’은 그 극단적인 영화적 설정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의 주류 미디어 역시 사람들에게 현실의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들은 심사위원이라는 권력자 앞에서 생존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들의 드라마틱한 사연을 비추며 시청자들이 ‘무한 경쟁’이라는 삶의 조건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대한민국의 뉴스는 끊임 없이 북한 관련 추측 보도를 남발하며 공포감을 조성한다. 특정 기표를 반복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중요한 선동 수단이다. 이를테면 ‘국민화합’, ‘국론 통합’이라는 말들이다. 여기에는 다른 의견을 묵살하겠다는 의지가 숨겨져 있다. 많은 이들이 반대하는 국정 역사 교과서를 끝내 밀어 붙이는 상황에서는 ‘올바른’이라는 단어가 동원되어 선동 주체의 의도에 맞게 왜곡된다. 이것 역시 선동인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부드러움으로 포장된 선동’이다.


어버이연합은 툭하면 “선동하지 말라”고 외친다. 그들은 반세기가 넘는 헝거 게임에 잔뜩 노출되어 이미 충분히 선동된 캐피톨의 시민들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미디어의 오랜 시간 반복되는 부드러운 선동은, 광화문에서 외치는 그 어떤 공격적이고도 과격한 선동적 구호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의 주류 미디어가 선동 매체로 굳건히 장악된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판엠에서 과연 누가 모킹 제이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