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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재판, 대법원은 국민 요청에 부응했나

김용국 프로필 사진 김용국 2016년 04월 11일

법원공무원 겸 법조 칼럼리스트


국민들은 법관이 폭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관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혜안, 사회적 갈등과 가치관의 충돌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균형감각과 공정한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약자는 물론 다양한 분쟁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법정을 찾게 된 당사자까지도 배려할 줄 아는 따뜻한 이해심과 포용력을 바탕으로 원숙한 인품을 갖춘 지혜로운 인격자이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지난 1일 열린 신임 법관 임명식 자리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이와 같은 국민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은 법관의 숙명”이라고도 강조했다.


지당한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판결들을 보면 판사들이 국민의 요청에 부응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특히 긴급조치 등 과거사 재판에서 대법원이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살이를 했던 조희연 교육감 등 유신시대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이 지난 8일, 2심(서울고법)에서 원고 전부패소로 뒤집혔다. 1심은 국가의 책임을 인정,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사건 내막부터 알아보자.


조 교육감 등은 유신시대인 1978년 유신헌법 폐지, 긴급조치 비판의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고 시위를 한 혐의(긴급조치 9호 위반)로 영장 없이 체포돼 구속기소됐다. 이들은 구금상태에서 협박과 폭언, 구타를 당하고 자백을 강요받기도 했으며 법원에선 유죄판결이 확정돼 징역살이를 했다.


유신헌법을 근거로 한 긴급조치는 시민들의 건전한 토론마저 범죄로 취급하는 초법적인 규정이었다. 개헌 논의, 집회 등 일체의 정치행위를 막고 신체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을 마음대로 제한했다.


그런데도 법원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위헌성을 언급한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통치행위는 사법적 심사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은 막강한 힘을 발휘해왔다.


법원에서 구제받지 못한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리자 대법원은 2010년에서야 처음으로 “긴급조치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법원은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이므로 사법심사의 자제가 기본권을 보장하고 법치주의 이념을 구현하여야 할 법원의 법원의 책무를 태만히 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2010. 12. 16. 선고 대법원 2010도 5986 전원합의체 판결)며 긴급조치가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그 후 긴급조치 재심사건 무죄판결이 이어졌다. 조 교육감 등도 30여 년이 지난 2011년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2013년 무죄판결을 받았다. 여기까지 보면 법원은 유신시대 잘못된 사법판단을 바로잡은 셈이다.


하지만 형사재판 무죄판결과 달리,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원은 상반된 결론을 내린다. 대통령의 국가긴급권 행사는 ‘정치적 책임’을 질 뿐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므로 불법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015년 대법원 판결의 일부를 보자.




긴급조치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이자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이 규정한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청원권,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므로 위헌ㆍ무효이다.


그러나 긴급조치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ㆍ무효로 선언되었다고 하더라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서 대통령은 국가긴급권의 행사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하여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므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는 볼 수 없다.



대법원 2015. 3. 26. 선고 2012다48824 판결

대법원은 유신시대 긴급조치권 행사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조 교육감 등이 낸 소송에서 불법행위를 인정했던 1심과 달리, 2심이 국가의 책임을 전면 부정한 것도 이 판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다. 1974년 유신체제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민청학련 사건으로 불법 체포, 구금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피해자들 29명이 낸 손해배상 소송도 대법원은 파기했다. 1심과 2심은 “국가가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는데, 대법원은 이것이 잘못됐다고 보았다. 지난 3월 24일 판결이다.


대법원의 논리는 간단했다. 시효가 지났다는 것이다. 1974년 피해를 입었다면 5년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도 당사자들은 37년 이상이 흐른 다음에야 소송을 제기했으므로 받아줄 수 없다는 게 대법원의 결론이다. 피해자들은 “대법원이 긴급조치 무효 판결을 한 것은 2010년 이후라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는 객관적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하급심조차 “국가기관의 위법행위 등을 원인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 국가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강조했지만, 대법원은 달랐다. 오히려 “국가에게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정만으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 소멸시효의 예외를 인정하는 데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무효라고 선언하면서도 정작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데는 궁색하다. 긴급조치로 체포, 투옥, 고문, 구속되었던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부정하는 판결은 반쪽짜리 과거사 청산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다시 대법원장이 제시한 법관의 상을 떠올려보자. 통찰력과 혜안, 균형감각과 공정한 안목, 사회적 약자 등을 배려하는 따뜻한 이해심과 포용력, 원숙한 인품을 갖춘 지혜로운 인격자.


이런 판사가 많을수록 법원의 신뢰는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고 국가기관의 불법을 단죄할 책임이 사법부에 있다는 점을 명심하는 판사가 더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