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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JP의 훈수에 열광한 이유

이강택 프로필 사진 이강택 2015년 03월 02일

전 언론노조 위원장

죽음은 모든 것을 청산한다고 했던가. 설 연휴 동안 박영옥 씨의 별세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었다. JP의 유명세에 박근혜 대통령과의 특수관계도 있으니 납득할 만도 했다. 그 후 2-3일에 걸쳐 여야 정치인과 각계의 조문행렬에 관한 기사며 사진이 보수신문들의 1면 톱을 장식했을 때조차 조금 오버하다 말겠지 했다. 연휴 직후라 기사거리가 부족하겠거니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JP를 수식하는 호칭이 풍운아에서 원로로, 원로에서 다시 거목으로 점차 격상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조문객들에게 그가 던졌다는 말들이 언론을 통해 ‘맞춤형 훈수’요 ‘어록’ 수준으로 추앙되기 시작하면서 해도 너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상(喪)중임을 감안한다 해도 가릴 건 분명히 가려야 하지 않았을까?


훈수란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대국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끼어들어 수를 가르쳐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그 표현이 적실하게 쓰이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언행이 이해관계로부터의 초연하고, 풍부한 경륜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 공동체의 지향과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음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식민통치기에 친일행보를 보였던 인사들에게 개인의 동기가 어떠했든, 아무리 재주가 빼어났든 훈수할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김종필 씨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군사 쿠데타의 주축으로 역사에 등장하여 공작정치의 산파 역할을 하고 굴욕적인 대일수교 협상의 주역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지역주의 정치가로 자리 잡은 인물 김종필. 백 보를 양보해도 그는 훈수 이전에 고해성사부터 시작해야 마땅한 인물이다. 노회함이야 인정할 수 있겠지만 결코 훈수를 둘 만한 현자(賢者)도 거인도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껏 자신의 과오에 대한 성찰조차 제대로 수행한 바 없는 것이 그이지 않은가.


대다수 언론들이 무비판적으로 주워섬긴 ‘훈수’의 함량 또한 격이 떨어지기는 매한가지다. 별로 새로울 것 없이 평소의 지론을 되풀이한 그의 ‘훈수’는 국민은 호랑이처럼 인정사정없는 존재라는 ‘국민 호랑이론’에서 출발하여, 정치란 (정치인 자신들에게) 허망한 것이니 과도한 권력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 허업(虛業)론’으로 이어지고,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인 간의 타협과 공존 그리고 그 귀결로서의 ‘내각제 촉구론’ 으로 귀결된다. 나는 그 훈수의 최종결론인 내각제에 대해서는 굳이 이 글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 없다. 대신 그 출발점인 이른바 ‘국민 호랑이론’ 만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의 훈수에서 몇 구절을 발췌하자면 이렇다.




호랑이는 고기 덩어리를 던져주면 넙죽하고 집어먹고, 여름에 목욕을 시켜주면 하품하면서 무표정이고, 그러다가 발이라도 잘못 밟으면 그냥 달려들어 물어뜯고.


암만 맹수라도 잘해주면 내 고마움을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놈은 그런 거 하나도 느끼지 못해...



기사를 처음 헤드라인으로만 접했을 때 나는 그가 그저 국민을 두렵게 여기라는 말을 한 줄로 알았었다. 임금을 배에 백성을 물에 비유하며 백성을 두렵게 여기라는 남명 조식의 민본론이나 혹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는 공자의 위민정치론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망발일까. 그의 언어에서는 오히려 국민들의 분별없음과 은혜 모름(!)이 강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전히 국민을 정치의 주인이자 최고주권자가 아닌 정치인들의 사육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물론 비유는 과장될 수 있으며 진의가 그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있다. 그러나 JP의 정치관이 얼마나 민주주의적 가치관과 거리가 멀고 시대착오적인지는 여기에서 이미 여실히 드러났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트루먼 미국 전 대통령을 들먹이며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그의 훈수는 민본정치의 기본마저 망각한, 그저 정치꾼의 값싼 언술에 지나지 않았다.


대다수 언론들이 조목조목 되뇌며 전파에 나선 ‘JP 어록’의 나머지 내용은 그래서 더욱 공허하고 무가치하다. 국민을 주의하여 사육하여야 할 짐승에 비유한 그의 기조를 바탕으로 추론한다면, 결국 ‘맞춤형 훈수’의 내용이란 정치인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권력보전에 위험을 불러오는 허망한 일이니만큼 피하고 공존공영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 그 궁극적인 방략으로 내각제라는 평소의 바람을 제시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흔이 다 된 김종필 씨가 자기 부인의 상가에서 조문객들에게 상투적인 덕담을 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흘러간 곡조를 읊조렸다고 하여 그 자체를 가지고 시비를 따지는 건 물론 불행한 일이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했건 그의 자유이자 권리일 수 있다. 어쩌면 JP 자신도 그의 훈수가 이 정도까지 파급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쓴다. 이미 기력이 쇠한 JP라는 아바타를 통해 말하는 복화술사는 과연 누구인가? 지난 일주일 사이 그의 상가를 배경으로 펼쳐진 일련의 의심스러운 흐름들 - 과거의 은원에 개의치 않는 보수정치세력들의 기민한 화해,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흘러넘친 이례적인 유대감,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진 JP의 어록, 어느덧 무비판적으로 지난 추억에 잠긴 퇴행적 정서의 확산 - 의 진정한 연출자는 누구였던가?


장례식이 끝난 이후 조선일보에는 김종필 씨의 훈수에 최대한 공명하며 그것을 기리는 칼럼이 이어졌다 (“정치거인임을 다시 느끼게 해준 JP의 힘”- 2월 24일/ “여야를 잊게한 JP”- 2월 26일). 날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집권세력의 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보수세력 총단결의 아이콘으로 JP를 부각한 권언복합체의 주술. 우리는 과연 언제쯤 그들의 헤게모니로부터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