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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었소'의 마력(魔力)

이강택 프로필 사진 이강택 2015년 04월 07일

전 언론노조 위원장

소위 ‘막장 드라마’들의 위세가 한풀 꺾인 것일까. 최근 드라마계의 최고 화제작은 단연 <풍문으로 들었소(이하 풍문)>다. 드라마 시청률의 전반적인 저하추세에도 불구하고 <풍문>의 방영을 전후로 SNS와 포탈에 피드백과 관련 기사가 끊이지 않는다. 대체 무슨 매력이 있기에 그럴까 하는 궁금증으로 보기 시작한 나 또한 어느새 ‘닥본사’ 대열에 합류하고 말았다. <풍문>에는 일반적인 매력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마력(魔力)이 있었기 때문이다.


<풍문>은 기본적으로 “제왕적 권력을 누리며 부와 혈통의 세습을 꿈꾸는 대한민국 초일류 상류층의 속물의식을 통렬한 풍자로 꼬집는 블랙코미디”다. 이야기는 영어캠프에 참가했다가 로열패밀리의 외동아들 한인상(이준 분)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낸 서민 가정의 딸 서봄(고아성 분)이 고교생 신분으로 임신하고, ‘논리의 제왕이자 의전의 달인’이라는 한국 최고 로펌의 수장 한정호(유준상 분)와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귀부인’ 최연희(유호정 분) 부부의 집에 들어가 출산을 하면서 충격적으로 시작된다. 행여 평판에 흠이라도 갈까 염려하던 한정호는 돈의 위력을 앞세워 봄이를 조용히 정리하려 들었다가, 그 시도가 실패하자 이번에는 그녀를 친정으로부터 격리하려 한다.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가자 봄이에게 사법고시 과외를 시켜가며 자신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스펙을 갖추게 하고, 족보까지 조작해가며 사돈집의 신분도 세탁시켜버린다.




<풍문으로 었소> 주인공 서봄(고아성. 왼쪽)과 한인상(이준. 오른쪽) ▲ <풍문으로 었소> 주인공 서봄(고아성. 왼쪽)과 한인상(이준. 오른쪽)

드라마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최상류층 부부의 가식과 이중성을 시청자들에게 남김없이 폭로한다. 모든 것을 완벽히 계산하여 행동한다는 사회지도층(?) 한정호의 이면에는 탈모에 대한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찌질한 중년 남성이 있고, 남들 앞에서는 짐짓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최연희는 남몰래 미신과 부적에 매달리고.... 거기에 전형적인 ‘을’ 서봄의 가족들이 등장하여 한정호 부부와 뚜렷한 대비를 이루고, 갑과 을의 민낯이 마주치면서 갖가지 해프닝들이 이어진다. 돈과 권력을 다룰 때 외에는 모든 면에서 ‘병맛’ 스럽기 일쑤인 ‘갑’의 우스꽝스러운 행태들, 그들의 품위가 상식에 의해 무너지고 그들만의 철옹성에 균열이 일어나는 장면들을 통해 전해오는 은근한 카타르시스가 <풍문>의 가장 대표적인 재미라 할 수 있다. ‘대사빨’ 역시 탁월해 세련된 풍자에 한층 힘을 싣는다. 연기자들의 연기와 호흡은 자연스럽고, 세트 구성이나 연출상의 디테일마저 철저하다. <풍문>에는 잘 만든 드라마라면 의례 지니게 마련인 미덕들이 빠짐없이 갖춰져 있다.




<풍문으로 들었소> 주인공 최연희(유호정. 왼쪽)와 한정호(유준상. 오른쪽) ▲ <풍문으로 들었소> 주인공 최연희(유호정. 왼쪽)와 한정호(유준상. 오른쪽)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웰메이드라는 단어나 유쾌한 풍자 정도로는 전부 표현해낼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드라마의 결이 어딘지 모르게 새롭고, 매 회가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풍문>을 ‘웰메이드 드라마’ 이상의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그 매력 혹은 마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우선 연출 스타일이 독특하다. 편집의 호흡이 짧고 복수의 장면들이 빠르게 교차하는 여느 드라마들과는 달리, <풍문>은 롱 테이크(Long take) 기법을 자주 사용하여 편집의 호흡을 상당히 길게 가져간다. 클로즈업과 빅 클로즈업을 자주 배치해 인위적으로 긴장을 조성하는 일반적 추세를 거슬러 상대적으로 넓은 화면 속에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배경을 표현해낸다. 인물 중심의 국부조명보다는 약간 어두우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전체노출을 주로 사용하고, 분량 대부분을 상당한 규모와 정교함을 갖춘 세트를 무대로 촬영한다. 공들여 만든 세트와 정적인 카메라워킹을 결합함으로써 시청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등장인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찰자적 시점을 견지하게 된다. 때문에 작품의 주 무대인 한정호 부부의 집은 부와 화려함의 기호에 불과한 여타 드라마 속 부잣집들과 달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나 등장할 법한, 동화 속 같은 불합리의 공간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게 된다.


이야기의 전개 방식 또한 연출 기법 이상으로 새롭고 참신하다. 드라마 작가들은 대개 정해둔 기승전결을 풀어나가기 위해 그때그때 새로운 인물을 투입하거나 관계들을 급격히 비틀어가는 방식을 선호한다(등장인물들 다수를 사망한 것으로 처리해 악명이 높았던 모(某)작가의 경우와 기억상실증에 의존해온 여태까지의 수많은 드라마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풍문>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관계를 구성했던 초반부를 지나서부터는 결코 무리하게 이야기를 끌어가지 않는다. 그 대신 기존 관계의 미세한 변화와 떨림에 현미경을 들이대어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장면들을 생산해낸다. 을의 분노에 편승해 갑의 민낯만 조소하는 전형성의 틀 또한 벗어나 있다. 갑질에 맞서지 못하는 을의 비겁함과 상황만 달라지면 갑을 따라 하기 일쑤인 을의 부조리함에도 메스 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렇게 특정의 ‘착한 인물’에 편하게 감정 이입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풍문>은 시청자들에게 주체적인 감상에 필요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디테일에 주목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그렇게 생겨난 소격효과는 ‘거울’ 장치의 도입을 통해 한층 더 증대된다. 비서, 집사 부부, 과외교사와 같은 인물들은 한정호의 성채에서 벌어지는 온갖 행태들을 구경하듯 넘겨보다가 하나의 에피소드가 지나갈 때마다 서로 수군대며 판세를 정리해준다. 이들의 역할 역시 시청자들을 몰입과 동일시로부터 건져 올려 ‘거리 두기’와 성찰을 용이하게 해준다.


때문에 <풍문>의 매력은 단순히 블랙코미디라는 낯선 장르를 훌륭하게 연출해냈다는 미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정통적인 블랙코미디에서는 볼 수 없는 깨알 같은 풍자와 마당극적인 해학, 그리고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연상시키는 빼어난 소격효과가 <풍문>만의 고유한 강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풍문>의 매력을 한 번 보면 빠져드는 마력(魔力)으로 격상시키는 근본적인 힘은 결국 2015년 대한민국의 현실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한옥에 현대식 건축을 덧씌운 한정호의 집이 상징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자신을 봉건의 틀에 가둔 채 귀족 코스프레하는 허당스러운 ‘슈퍼갑’들, 그들의 수족이 되어 갑질을 돕는 피고용인 집사들, 갑에 대한 증오와 동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무기력한 을들.... <풍문>을 볼 적이면 생때같은 아이들 수백 명이 수장되는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고서도 진상규명은커녕 인양조차 피하고, 비정규직 차별을 완화한다며 더 많은 ‘장그래’를 양산하며, 남의 나라 방위를 위해 수조원을 들여 미래에 화근이 될 무기체계를 자청해서 들여오려는 이 땅의 슈퍼갑들이 떠오른다. 점차 그들에 대한 저항 의지를 잃어가고 어느새 조금씩 그들의 논리에 동화되기도 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여, 모처럼의 빼어난 드라마를 보면서도 마음은 씁쓸하고, 그러면서도 다음 방영을 고대하는 역설. <풍문>은 ‘웃픈’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