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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신드롬이 불편한 이유

이강택 프로필 사진 이강택 2014년 12월 24일

전 언론노조 위원장

드라마 <미생>은 끝났지만 여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고 시청률 10%를 넘기면서 콘텐츠파워지수 1위를 기록하고, 원작 웹툰의 판매량이 200만부를 돌파한 데 이어 시즌2의 제작이 벌써 가시화되고 있다. 온갖 매체들이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해 공감과 위안을 주고 희망을 말했다”며 ‘웰 메이드’, ‘명품’이라는 상찬을 늘어놓고 그 성공원인을 분석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내게는 이 <미생> 신드롬이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온다. 정말 잘 만든 드라마라는 세평에 선뜻 동의하기도 어렵거니와,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킨 배경에 대해서도 뭔가 석연찮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생>에는 작법 상의, 특히 미시적 차원에서의 많은 특장들 – 예컨대 디테일의 예리한 포착, 다양한 캐릭터들을 살려내는 전개방식, 싱크로율 높은 캐스팅과 실력파 연기자들의 재발견, 기억상실과 러브라인 등 ‘막장’스러운 흥행공식의 탈피 – 이 존재한다.


통상적이지 않은 소재를 다루면서 광범한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미생>이 거둔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비정규직들의 애환을 대변하고”, “이 시대 ‘을’들의 아픔과 희망을 그려낸”, “모든 미생들을 위한 드라마”라는 찬사들은 과연 진정으로 합당한 것일까? 이 칭송들은 대체 어디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일까?




▲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 TVN ▲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 ⓒ TVN

<미생>이라는 작품의 성격이 전형성의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주인공 장그래는 프로기사가 되기 위해 진력을 다했지만 불운이 겹치면서 비정규직 신세가 된 청년이다. ‘개인적인’ 불운 탓으로 스펙을 갖추지 못했기에 그는 자신의 ‘결과적 나태함’을 탓하며 현실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무한긍정 마인드와 바둑수업 중 생긴 잠재력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고군분투해 정규직으로의 완생을 도모하는 것이 그가 택한 행동양식이다. 따라서 장그래라는 캐릭터와 그의 삶에는 애초부터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에 대한 사회·구조적 현실인식이나 노동자로서의 연대의식 등이 자리 잡을 여지가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남다른 자질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기에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지만, 그는 특수한 개인일 뿐이며 우리 사회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는 거리가 먼 존재다. 따라서 장그래의 이야기는 자본과 기득권층에게 아무런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실제로 <미생> 20부 중 어디에서도 비정규직 제도 자체의 정당성은 결코 도전받지 않는다.



미생이 외면한 ‘지옥같은 회사 밖’


‘을’의 애환과 팍팍한 현실을 그리면서도 근본적인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을 저항 불가능한 것, 또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표상하는 <미생>의 어법은 회사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묘사하는 데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승진경쟁과 실적다툼, 사내정치, 다양하고 미세한 갑을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갖은 차별과 무시 등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미생>의 최고덕목으로 일컬어지며, 그 전쟁터에서 영혼과 자존심을 지켜나가려는 ‘미생’들의 인간적인 몸부림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안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고위간부와 중간간부, 중간간부들과 정규직, 기존직원과 신입사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직원과 남자직원 사이의 문제로만 재현된다. 소외는 단지 인간군상이라는 현상적 차원에서 묘사될 뿐, 그 배후의 착취구조와 그것을 강요하는 자본가들의 존재는 철저히 가려진다.


필자의 경우 시리즈의 절반을 넘는 회차를 시청했지만 회사의 소유주는 고사하고 사장의 모습을 겨우 두 차례 볼 수 있었다. 그나마도 아주 잠깐씩, 상당히 온후하고 분별력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본가들의 존재는 절대화·신비화되고 그들의 한 마디는 지상명령, 즉 변경하거나 도전할 수 없는 질서로 표상된다. 원 인터내셔널 내부는 노동조합도 노동자도 존재할 수 없는, 자본에 의해 이미 평정된 세상이다. 직원들은 모든 사회정치적 관계와 그에 대한 독자적인 의식을 저당 잡힌 채 자본의 논리를 내면화시킨 존재들로 그려질 뿐이다.


따라서 그 어떤 작품보다 ‘리얼’한 드라마라던 <미생>의 마지막 회가 판타지적인 영상과 설득력 없는 위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감동 없이 막을 내린 것은 차라리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오 차장과 영업3팀은 일에 모든 것을 건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성의와 노동은 예사로운 일처럼 간과되지만, <미생>은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업3팀은 종내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을 놓고 업무성과를 통해 승부를 벌인다. 자본의 축적욕망 실현에 기여하고 그 대가를 통해 자신들의 인간적인 소망을 이루겠다는 것, 하지만 일이 꼬이면서 오히려 오차장이 회사에서 밀려나고 만다.




▲ 드라마 <미생> ⓒ TVN ▲ 드라마 <미생> ⓒ TVN

이 대목에서 <미생>은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언명에 부합하지 않는 낭만적 해피엔딩 방식을 찾아내 제시한다. 오 차장이 스스로 회사를 차리고 계약직 신분이 만료된 장그래를 자기 회사의 정규직으로 채용한다. 장그래는 어느덧 정규직이 되고도 남을 정도의 영어실력과 업무능력을 갖추고 있다. 오 차장이라는 합리적인 리더와 장그래와 같은 워커홀릭의 유능한 직원들을 갖춘 이 신생기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미생>은 이렇게 주인공들이 철저히 자본의 논리 내에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함으로써 다시금 희망을 발견하는 것으로 ‘안전하게’ 끝을 맺었다. 이 판타지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이례적인 스펙터클과 액션을 연출하고, 희망에 관한 루쉰의 명언까지 동원해가며 안간힘을 썼지만 마지막 회를 시청자들의 실망으로부터 구해줄 수는 없었다. <미생>은 마지막 회에서 스스로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명백하게 드러내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비정규직들의 애환을 대변한”, “모든 미생들을 위한 드라마”라는 항간의 과도한 칭송에 내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핵심적인 이유이다.



‘러브라인’ 찾는 지상파…미디어자본 이길 수 있을까


또 하나의 불편한 지점은 <미생>이 미디어자본을 대표하는 CJ E&M에 의해 제작·유통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한다. 주지하듯이 CJ그룹은 국내외 금융자본과 결합해 케이블TV SO와 PP, 영화, 음반, 게임 등 콘텐츠업계를 좌지우지하는 거대 공룡이다. 이번 <미생> 신드롬은 자본에게 껄끄러운 소재도 안전하게 다듬어서 상업적 이익을 위해 활용해내는 미디어자본의 역량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강력히 시사해주고 있다. 드라마 내내 넘쳐났던 PPL(간접광고)이나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원소스 멀티유즈 식의 영리활동은 물론, 우호적인 기사들로 엄청난 러시를 만들어냈던 홍보 네트워크 역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미생>은 거대 미디어자본 내습의 예고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예감이 불편함의 두 번째 원인이다.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있는 지상파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불편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러브라인이 없다고 <미생>을 내쳤을 만큼 안이한 관행과 경직된 틀에 묶여있는 그들이 과연 거대자본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다. 이처럼 무서운 속도로 자본에 의한 잠식이 진행된다면 미디어생태계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자본이 만들어낸 담론과 콘텐츠가 점차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한 판국에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담론 지형은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바야흐로 세계적인 차원에서 신자유주의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한국사회에서만큼은 더욱 심화된 단계로 나아가며 기승을 부릴 조짐이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무효판결이 뒤집힌 것으로도 모자라는지 자본가들과 현 정권은 정리해고 요건의 완화를 조만간 관철시킬 태세다. 서비스발전기본법을 통과시켜 의료, 교육, 방송 등 공공서비스 부문에서 대대적인 민영화와 비정규직화를 도모할 작정이다.


이토록 현실은 엄혹한데 우리사회의 담론과 문화적 상상력은 기껏 <미생> 정도에 취해 지배 이데올로기 내에서 뱅뱅 제자리걸음이다. 이러니 <미생> 신드롬이 어찌 불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