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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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왕실이 사는법

장정훈 프로필 사진 장정훈 2015년 02월 03일

독립 프로덕션 KBNE-UK 연출 및 촬영감독. 해외전문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한국 독립프로덕션과 방송사들의 유럽 취재/촬영/제작 대행 및 지원. The Land Of Iron 기획/연출

영국의 왕실은 어떻게 그렇게 건재한 걸까? 영국사람들은 왕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어 몇해전 끄적였던 취재기를 올려봅니다.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백마가 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만면에 행복 가득한 미소를 띱니다. 그리고 유유히 손을 흔들죠. 마차가 가는 길은 왕자와 왕비를 축복하러 나온 백성들로 가득하고, 하늘에서는 축복의 꽃가루가 하염없이 흩날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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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모든 여인들이 꿈꾸는 로망 입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오래된 동화 속의 한 장면이죠.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현실이고, 생활입니다.


바로 이 주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죠.


Her Majesty The Queen, Buckingham Palace, London, SW1A 1AA


2011년 4월, 세기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왕위서열 2위인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미들턴의 결혼식이었죠. 8천 5백 명의 저널리스트들이 전 세계에서 달려왔고, 180개국 20억 명의 인구가 이들의 결혼식을 지켜봤습니다. 길거리 파티도 영국 전역 5천 곳에서 열렸고요. 결혼식 전날 밤부터 버킹검 궁전과 국회의사당 일대는 텐트와 침낭을 들고나와 밤샘하는 시민들로 불야성을 이루었습니다. 영국 전역은 물론,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 전 세계에서 몰려온 시민들이었죠. 비행깃값이며, 체류비며 만만치 않은 경제적인 부담을 감수하고, 버킹엄 궁전 앞으로 모여든 겁니다. 열성일 수도 있고, 극성일 수도 있고…


그런데 말이죠.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왕실 결혼식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21세기에 왕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죠. 그것도 민주주의의 발상지라는 영국에 말입니다.


한 커플을 만났습니다. 상당히 흥분하더군요.




왕실 가족에게 욕을 해주고 싶어요. 이 어려운 시기에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쓰며 결혼식을 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예요.


어떻게 권력을 쥐고 태어날 수가 있어요? 우리가 뽑은 사람들도 아닌데 어떻게 우리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죠? 재산도 자그마치 7조원 이라니. 공평하지 않아요. 보통사람들은 매일 생활고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잃고 있어요. 공공예산 삭감해가며 우리한테는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자기들은 인생을 즐기고 있잖아요.

커플은 기차역 안으로 홀연히 사라집니다. 국가 공휴일로 선포된 이날 왕실의 결혼식 따위엔 관심이 없다며 여행을 떠나버린 영국인의 숫자는 350만 명에 달했습니다. (여행사 연합회 ABTA 발표).


리처드 버넌 이라는 시민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여왕은 범죄에도 기소되지 않아요. 조사하는 게 불법이죠. 영국에서는 여왕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아주 낮은 계급입니다.



군주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문제는 무관심한 사람들과 찬성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거죠. 리퍼블릭 (공화주의)이라는 단체가 가장 선봉에서 군주제 반대를 이끌고 있는데 회원이 대략 1만 6천 명 정도 입니다. 어떤 힘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적은 숫자죠. 그래서 아직 왕실이 존재하는 다른 7개 유럽국가의 군주제 반대단체와 연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스페인,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대표적이죠. 물론 이 중에 영국왕실이 돈도 가장 많고, 힘도 제일 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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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다양합니다. “국가 기강이나, 국민단결에 도움이 된다”, “연예인들처럼 국민을 즐겁게 한다” 같은 의견도 있고요. “국가 이미지 제고나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중 관광객 유치를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윌리엄과 케이트의 결혼식만 보더라도 60만 명의 해외관광객이 찾아와 1조 8천억 원의 경기부양 효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했고요. 향후 4년간 4백만 명이 더 영국을 찾을 것으로 기대를 했죠. 영국 관광청이 말입니다.


그런데 계산기를 잘 두드려 보면 꼭 남는 장사만도 아닙니다. 영국이 왕실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한 해에 7백억 원에 달하거든요. 간난 아가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한 사람당 1,200원씩 부담을 하는 셈이죠. 그 유명한 보스턴 컨설팅은 영국에 군주제가 없어지면 약 1조 원에 상당하는 생산성 향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전망한 바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만 따지면 없어지는 게 마땅하다는 이야기죠.


경제가 워낙 안 좋다 보니 윌리엄과 케이트도 국민 정서를 많이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조촐하게 치르겠다고 했죠. 그런데도 결혼식비용으로 360억 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참고로 일반 영국인의 평균 결혼식 비용은 3천6백만 원 입니다. 경찰 5천 명 동원에 나랏돈 130억 원이 들어갔고요. 행사 후에 행사장 주변을 청소하는데도 7억 2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써야 했거든요. 그뿐이 아닙니다. 다니엘 핌롯 이라는 파이낸셜 타임스 경제부 기자는 결혼식을 공휴일로 지정해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액이, 정부 쪽 추산 5조 3천 5백억 원, 영국 산업연맹 추산 10조 7천억 원에 이른다고 말하더군요.


흔히들 '영국왕실은 정치적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국사람들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고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만도 않은 게, 국회에서 결정된 정책들이 최종단계에서 왕의 동의를 얻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정책 결정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정치권에서 합의한 내용에 대해 여왕이 최종 싸인을해줘야 효력이 발휘된다는 겁니다. 소위 '바지사장'이니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바지사장'도 사장은 사장이라는 거죠. 왕실이 영국사회에 미치는 간접적인 영향력 또한 상당합니다. 여왕이나 왕실에서 한마디 하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거든요. 왕실의 권위라는 게 있으니까요.


영국에 왕실이 없어지지 않고 존재한다는 건 사실 모든 이들에게 미스터리 입니다.


로빈 아처 라는 런던대학교 (LSE) 정치사회학과 교수는 그 비결을 이렇게 말하더군요.




요즘 연예인 스타일, 즉 스타중심의 문화가 중요해졌는데 신통하게도 왕실은 그걸 알고 그걸로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다이애나의 죽음 이후에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죠. 영국 군주제는 마지막으로 남은 다국적, 제국적 군주제입니다.



여기서 교수가 '다국적, 제국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호주나, 캐나다 같은 옛날 영연방 국가들이 아직도 영국의 여왕을 자기들의 여왕으로 섬기고 있기 때문 입니다. 교수가 지적했듯이 영국왕실은 대중에게 수많은 가십거리와 뉴스, 스캔들을 제공하면서 스스로 스타화, 연예인화되고 있습니다. 21세기 최고의 생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죠. 윌리엄과 케이트의 결혼식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연예인에 대한 관심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국민은 버킹엄 궁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심각하게 바라보기보다는 하나의 엔터테이먼트로 보거든요.


왕실의 성은 아직 견고합니다. 그들은 '민주주의 정신'의 가치를 생각해 스스로 그 성을 허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중의 심리를 잘 파악해 성을 더 견고하게 다지려 노력하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도 성을 견고히 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보면 맞을 겁니다.




아이들에게 사회계층을 이야기 할 때 누구나 계급상승이 가능하다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 거 잖아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가르칠 수도 있어야 하고요.
-리퍼블릭 회원


딸에게 인생은 결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말해 주고 싶어요. 케이트처럼 결혼으로 바뀌는 인생은 올바르지 않아요
-어느 주부

당연한 말인데 영국에서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참, 멀리 해외에서 결혼식을 구경하러 온 시민들에게 이런 것도 물어봤습니다.


"당신네 나라에 군주제가 부활한다면 그래서 왕가가 생긴다면 찬성할 건가요?"


열 명중에 열 명이 모두 "아니요"라고 하더군요.


결혼식을 즐기려고 왔지만, 군주제를 지지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