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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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눈물

장정훈 프로필 사진 장정훈 2015년 08월 04일

독립 프로덕션 KBNE-UK 연출 및 촬영감독. 해외전문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한국 독립프로덕션과 방송사들의 유럽 취재/촬영/제작 대행 및 지원. The Land Of Iron 기획/연출

그리스를 다녀왔다. 다녀와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머리가 내린 결론이 아니라 가슴이 내린 결론이었다.




통계, 분석 다 쓸데없다. 일단 살리고 봐야 한다



32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임한 엘레니의 집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물병과 당뇨약, 남은 식빵 몇 쪽이 전부였다. 2천 500원짜리 식용유 한 통 살 돈이 없다 했다. 물세는 2년이나 연체상태라 언제 끊길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기가 끊겼을 때 초, 자동차 배터리를 동원해 별짓을 다 해야 했다고 했다. 자동차는 물론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남편은 2년 전 실직을 당했고, 36살, 32살, 26살인 자녀 셋은 모두 직장을 구하지 못해 실업자 신세라 했다. 온 가족이 32년 동안 공무원 생활을 한 엘레니의 연금 60만 원에 생존을 의지하고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형적인 중산층의 모습이었을 엘레니 가족의 삶은 더는 떨어질 곳 없는 밑바닥 그 자체처럼 보였다. 그녀는 어느 집이나 사정이 비슷하다고 했다. 남편 드미트리 씨는 한 캠페인 단체에서 돈이 없어 끊긴 전기나 물을 무단으로 연결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가 끊긴 전기를 연결해 준 집만 700곳이라 했다. 어느 집이나 사정이 비슷하다는 엘레니의 말을 증명하듯.


크리스티나가 보여준 전기세 고지서엔 500만 원이 넘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4년 치가 쌓인 금액이라고 했다. 냉장고엔 물병 몇 개가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 역시 실직 4년 차였다. 실직 전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그녀는 연금도 없어 수입이 전혀 없다고 했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 18회 "그리스의 눈물" 중 ▲ 뉴스타파 목격자들 18회 "그리스의 눈물" 중

은행이 언제 망할지 몰라 불안한 시민들은 매일 현금 인출기를 찾았다. 정부의 조치로 하루에 찾을 수 있는 현금인출 한도가 7만5천 원이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씩 현금 인출기 앞에 서서 7만5천 원을 뽑아 집에 옮겨 놓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다. 취재를 도와준 현지 저널리스트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집에 현금을 보관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절도가 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은행에 찾을 돈이 있는,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주로 노숙자들이 이용하던 무료 급식소에 중산층의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제법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급식소를 방문했을 때도 말쑥한 차림새의 신사, 숙녀가 많이 보였다. 그곳 관계자는 하루평균 350명, 주말엔 500명까지 급식소를 찾는다고 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엘피스 종합병원의 원장 테오도로스는 사람이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며 개탄했다. 병원운영 예산이 3분의 1로 줄어서 인력, 시설, 약품 수급에 지장이 많다고 했다. 다른 예산은 다 줄여도 의료만큼은 줄이면 안 된다며 책임자를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분개했다. 독일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의 생활상을 알게 되면 그리스를 지금처럼 취급하지는 못할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 카페에서는 경제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으니 곧 그들의 차례도 오겠지만, 그들 중에도 상위 1%는 여전히 위기 밖에 있을 터였다. 스위스 계좌에 부패한 그리스 기업인들의 돈이 꽤 보관되어 있다니 말이다. 위기 밖에 있는 곳은 또 한곳이 있었다. 관광지였다. 해외여행객이 주를 이루는 관광지는 별 탈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영세 자영업 위주의 관광 산업이 그리스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줄 일을 만무하니 99%의 그리스 인들은 엘레니와 같이,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정에서 만난 사람들도, 시장통에서 만난 사람들도,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시위대 속에서 만난 사람들도 이구동성 어제보다 오늘이 나쁘다 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쁠 거라 했다. 그리고 그 너머엔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상상도 안 된다고 했다. 막막하고, 불안하다 했다. 좌파정권도, 우파정권도, 치프라스 총리도 더는 믿을 수 없다 했다.


실업은 자살을 부른다. 실업률이 높아지다 보니 자살률도 덩달아 높아져서 하루 평균 2명이 목숨을 끊는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경찰청 발표는 그보다 훨씬 심각하다. 경제위기가 시작된 2009년부터2012년 사이에만 3,124명이 자살을 했다니 말이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도 자살로 자식을 잃은 사람이 있었다. 엘피스 병원장의 아들은 지난 5월, 26살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 2012년,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구하는 신세가 되기 전에 죽음을 선택하겠다며 자살한 사람은 약사 출신의 77세 노인 이였다. 먹고사는 데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은 사람들마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가고 있는 나라가 오늘에 그리스다.


5년째 계속되고 있는 긴축으로 가뜩이나 적은 월급이 22%나 깎이고, 연금은 반 토막에도 못 미치고, 일자리도 사라지고 (실업자가 4명 중 1.5명), 의료서비스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국가는 카드를 돌려막듯 빚으로 빚을 막고, 절망에 빠진 국민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상황이 이런 지경인데 독일과 프랑스, IMF를 비롯한 채권단의 처방은 변함없이 긴축, 긴축, 또 긴축이다. 그 외에도 그들이 내놓는 조건은 하나같이 내정간섭에 가깝다. 그런 내정간섭을 충실히 따르며 빚을 갚아온 그리스인들이 맞이한 건 오늘 우리가 목도하듯, 경제회복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다. 그런데 똑같은 내정간섭을, 아니 더 강도 높은 내정간섭을 받아들여야 돈을 더 빌려주겠단다. 받아 봐야 또 빚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갚아야 할 빚은 이자가 더해져 하루하루 늘고 있고, 채권단의 추가 지원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상황이다.


유로존을 탈퇴하기에도 너무 늦었다. 이 시점에 그리스가 다시 자체화폐를 사용하게 되면 화폐의 가치는 휴지와 같을 것이고, 그 휴지 같은 돈으로 어마어마한 빚을 갚을 방법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휴지 같은 돈으로 식량과 의료품 석유 같은 에너지도 수입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수출산업도 없는 그리스. 식량도 에너지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그리스로써는 지금의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란 딱 하나밖에 없어 보인다. 부채를 탕감받는 것. 채권단의 대표격인 독일은 기억해야 한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그리스를 비롯한 20여 개 채권국이 전쟁 과정에서 진 빚을 절반으로 삭감해주고, 나머지 절반의 채무도 무역 흑자가 발생했을 때만 상환하고, 상환액도 수출액의 3%로 제한해준 사실을 말이다. 더구나 유로존을 만들어 가장 큰 재미를 본 나라가 독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 뉴스타파 목격자들 18회 "그리스의 눈물" 중 ▲ 뉴스타파 목격자들 18회 "그리스의 눈물" 중

그리스는 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의 대서사시이며 학살이다. 죽어가는 사람의 목을 틀어쥐고 너의 게으름과 부정부패와 어리석음이 자초한 거라고, 빌린 돈을 갚기 전엔 죽을 자격도 없다고 협박하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한다. 자비가 없는 자본주의는 폐기돼야 한다. 감상적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일단 사람을 살리고 봐야 한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테니 말이다.


국가의 빚은 곧 국민의 빚이다. 그 국민에는 내가 포함된다. 그리스는 우리에게 그걸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3,784조 원의 빚이 있다. 전 국민이 2년 8개월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일해야 갚을 수 있는 빚이다. 그 빚이 그리스처럼 폭탄이 돼서 국민의 숨통을 조이는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