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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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것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다

장정훈 프로필 사진 장정훈 2016년 08월 16일

독립 프로덕션 KBNE-UK 연출 및 촬영감독. 해외전문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한국 독립프로덕션과 방송사들의 유럽 취재/촬영/제작 대행 및 지원. The Land Of Iron 기획/연출

- 영국 국민은 왜 유럽연합 탈퇴를 선택 했을까?


6월 24일 아침, 영국은 들뜨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초여름 아침 햇살이 찬란했다. 전날 치러진 투표결과가 새벽공기를 가르며 TV로, 라디오로, 신문으로 전해졌지만, 그뿐 이였다. 출근길 전철은 여전히 콩나물시루였고, 막 커피를 내리기 시작한 커피숍의 커피 향도 평소처럼 피어올랐다.


3년 전, 데이비드 카메룬 전 총리는 유럽연합 탈퇴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럽연합을 구실삼아 분열을 일삼는 세력을 단칼에 정리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런데 자신이 빼 든 칼에 자신이 베이고 말았다. 모두가 ‘설마’ 했지만, 그 설마에 총리가 잡혔다. 그는 빛의 속도로 ‘최고권력’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잔류를 주장했던 제가 탈퇴를 원하는 국민을 이끄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 데이비드 카메룬 전 영국 총리 ▲ 데이비드 카메룬 전 영국 총리

유럽연합(EU) 탈퇴를 주장하는 편에 선 사람들은 거짓말과 도를 넘는 과장, 선전과 선동을 능란하게 구사했다. 그들은 거대 야당, 노동당의 상징인 빨간색 버스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마치 노동당이 탈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잔꾀였다. 기실, 노동당은 잔류를 지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국독립당(UKIP) 당수 나이젤 파라지는 캠페인용 차량에 대형 ‘시리아 난민 탈출행렬’ 포스터를 싣고 다녔다. 시리아 난민들이 몰려오는 공포감을 조장하기 위한 저급한 꼼수였다. 난민과 이민자 문제는 다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럽연합 탈퇴의 깃발을 든 대표적인 인물은 나이젤 파라지와 전 런던시장 보리스 존슨 그리고 총리의 오랜 친구이자 법무부 장관인 마이클 고브였다. 보리스 존슨과 마이클 고브는 데이비드 카메룬과 같은 보수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에 서서 탈퇴의 깃발을 격하게 휘둘렀다. 그들은 영국이 유럽연합 분담금 명목으로 매주 3억 5천만 파운드(약 5천억원)를 내다 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파운드를 불 속에 던져 태워버리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 분담금의 상당액이 영국으로 되돌아와 수많은 곳에 혜택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이다.




▲ 시리아 난민 탈출행렬을 부착한 영국독립당의 캠페인 차량과 나이젤 파라지 당수 ▲ 시리아 난민 탈출행렬을 부착한 영국독립당의 캠페인 차량과 나이젤 파라지 당수

그들은 영국 정부가 모든 이민자에게 매달 1,000파운드(약 150만원)를 지급하고 있다고 떠드는가 하면 터키가 곧 유럽연합에 가입해 수백만 명이 몰려올 거라는 근거 없는 소문을 대형 옥외광고판을 통해 퍼트리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왕이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더 썬: The Sun> 같은 극우 언론에 흘리고 유럽연합으로부터 독립할 때가 되었다며 EU 탈퇴를 마치 ‘숭고한 독립운동’처럼 과장하기도 했다. “우리는 나라를 돌려받기를 원한다”는 구호는 이성를 버리고 가슴을 쫓게 만들었다.


잔류를 주장하는 쪽은 반대편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일단 보수당이 완벽하게 둘로 쪼개졌다. 당연히 총리의 영향력도 반동강이 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1 야당 노동당은 잔류를 주장하는 대표단체(I`M IN)와 공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민을 설득하려 들었다. 당연히 두 단체 사이에 엇박자가 이어졌다.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의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도 문제가 되었다. 채널4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은 유럽연합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며 다만 현실적 측면에서 7대 3 정도로 잔류를 지지한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그의 잔류 지지가 매우 소극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급기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영국을 전격 방문, 지원에 나섰다. 그는 “영국이 유럽연합에서 탈퇴할 경우 미국은 영국을 경제적 협상 우선순위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의 방문은 오히려 역풍을 불렀다. 미국이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 가장 가까이서 우방으로써의 책임을 다한 영국에게 어떻게 그런 협박성 발언을 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IMF 총재와 OECD 총재도 영국이 경제적으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며 지원사격을 벌였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노동자와 서민들은 IMF가 뭔지, OECD가 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유럽연합 잔류를 주장하는 진영에게는 이 모든 걸 뛰어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이민자 문제였다. 카메룬 정부 이후 영국은 매년 33만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매년 케임브리지 인구만큼 이민자가 늘고 있는 셈이었는데 이는 보수당이 공약한 숫자의 3배에 해당했다.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방에 사는 실업자와 노동자, 노인들에게 탈퇴를 주장하는 무리의 선동은 제대로 먹혔다.


그들에게 정보나 주장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민자들 때문에 영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고, 이민자들 때문에 복지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다. 유럽연합이 그런 이민자 통제를 가로막고 있고 무능한 영국 정부는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정치인들이 자신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며 서러워했다. 그들에게 정치인이란 존재는 런던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공장이나 공사판 같은 곳에서 노동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래서 서민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들이었다.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우리를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정치인들, 너희들은 해고야!”라고 외치라고.


투표결과 세대별로, 지역별로 그리고 학력과 경제 수준별로 영국사회가 얼마나 크고 분명하게 분열되어 있는지가 드러났다.


탈퇴 51.9%, 잔류 48.1%. 유럽연합 잔류에 표를 던진 48.1%는 주로 젊은 층, 대졸에 중산층 이상, 런던을 비롯한 도시민들의 목소리였다. 반면 탈퇴를 원한 51.9%는 지방이나 시골에 사는 저학력, 저임금 노동자와 노인층의 목소리였다.


유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여행하고, 사업하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던 젊은 사람들은 늙은이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빼앗았다며 통곡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젊은이들이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5세 이상 노인의 투표 참여율은 83%에 이른 데 반해 18~24세의 투표 참여율은 36%에 그쳤으니 말이다.


6월 23일, 온 세상이 영국이 독배를 마셔버렸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날 이후 데이비드 카메룬 총리가 사임하고, 새 총리와 내각이 출범하고, 파운드화가 최저치로 하락하는가 하면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등 적지 않은 정치 경제적 변화가 있었다. 아직 개개인의 생활에까지 충격이 파고든 정도는 아니지만, 영국 정부가 현실화되는 불길한 예측들을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의 요소는 있다. 새 총리 테레사 메이는 첫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국민투표는 서민들이 우리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습니다. 서민 여러분이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때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혜택받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인 여러분이 원하는 바를 살펴 이 정부를 이끌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삶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테레사 메이 신임 영국 총리 ▲ 테레사 메이 신임 영국 총리

영국은 소외당하는 민중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폭력이 아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드러났다. 리더는 정직하게 약속을 지키고 최대치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EU가 뭔지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투표결과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누가 그들을 무지하도록 소외시키고 방치했는가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장담할 수는 없으나 영국이 장기간 이어질 변화의 물결을 잘 헤쳐나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반전의 역사를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자 가지게 된다.


PS: 참고로, 국민투표 결과가 법적 효력을 발휘하려면 국회를 통과해야 하고 총리가 유럽연합에 ‘탈퇴’를 통보해야 한다. 그 이후에도 유럽연합 차원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들이 남는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상황이 수년에 걸쳐 지루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시간을 끌다가 슬그머니 유럽연합 탈퇴를 철회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국회나 총리가 국민투표결과를 거스를 수는 없을 거라는 게 중론이니 말이다. 그러나 철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유민주당은 지난번 국민투표가 ‘거짓선동’에 의한 결과였다며 2020년 총선공약으로 ‘유럽연합 탈퇴 철회’를 내놓고 있다. 만약 자유민주당이 집권하게 될 경우 국민의 뜻이 ‘철회’로 돌아섰다고 믿고 유럽연합 탈퇴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터무니없이 작은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