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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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골학교

장정훈 프로필 사진 장정훈 2017년 02월 09일

독립 프로덕션 KBNE-UK 연출 및 촬영감독. 해외전문 시사프로그램을 제작하고, 한국 독립프로덕션과 방송사들의 유럽 취재/촬영/제작 대행 및 지원. The Land Of Iron 기획/연출

영국의 한 시골학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런던에서 서쪽으로 4시간 남짓, 쉬엄쉬엄 가면 5시간도 넘게 걸리는 곳에 아쉬버튼(Ashburton) 이라는 시골 마을이 있습니다. 멀지만 지루하지 않습니다. 차창 밖으로 초록 들판이 펼쳐지고 그 위로 양과 소, 구름과 바람, 나무와 숲, 낮게 흐르는 개울이 여정을 함께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학교 이름은 샌즈 스쿨(Sands School)입니다. 샌즈 스쿨은 데본(Devon)을 대표하는 국립공원 내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데본하면 크림 티로 유명한 곳입니다. 크림 티는 영국의 대표적인 간식 중 하나인 스콘이라는 빵에 촉촉하고 부드러운 크림과 딸기잼을 바른 다음 밀크티와 함께 즐기는 음식입니다. 데본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할 음식문화입니다. 그중에서도 샌즈스쿨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카페 그린진저(Cafe Green Ginger)’는 단연 최고의 크림티를 선사합니다.


사족이 길었네요.


아무튼, 샌즈 스쿨은 제가 방문 의사를 전하자 전교생 회의를 통해 ‘와도 좋다’는 뜻을 통보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교생 회의’입니다. 샌즈 스쿨은 모든 걸 ‘전교생 회의’를 통해 결정합니다. 교장 선생님이나 교사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전체 학생에게 묻고, 토론하고 결정합니다. 샌즈 스쿨의 전체 학생 수는 80명 남짓, 교사는 21명입니다. 학생들의 나이는 열한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입니다. 회의에서 사회는 학생이 봅니다. ‘지위고하’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발언의 기회도 똑같이 갖지만 의결에서도 ‘1인 1표’의 원칙을 지킵니다. 매주 수요일 전교생 회의가 열리는데 학칙, 예산관리, 교사임명, 현안 등 모든 게 전교생의 토론을 거쳐 결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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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 스쿨에서 학생의 목소리는 참고하는 것으로 족한 정도가 아닌 ‘학교의 주인’, ‘최고 결정권자’의 목소리로 존중받습니다. 학교는 모든 면에서 '자유'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질서가 있습니다. 토론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 결정한 최소한의 원칙과 규정이 있으니까요.


제가 방문한 날엔 한 선생님이 농장을 방문해 먹거리의 유통경로에 대해 배워볼 수 있는 현장수업을 계획하고 있다며 학생들에게 의견을 구하더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커지고 커져서 동물 학대와 환경문제에 대한 토론으로까지 이어지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학생도 교사도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토론에 열기를 더했고 토론의 방식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 풍경도 연출이 되었습니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던 회의는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파진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빈자리가 많아질 때쯤 돼서야 자연스럽게 종료가 되었습니다.


점심은 당번을 정해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요리합니다. 식사도 설거지와 식당 청소도 함께 합니다. 점심때가 되면 학교에 음식 냄새가 솔솔 풍기는데 집 같고 가족 같은 학교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한 ‘방치행위’라고 하더군요.


수업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 학생의 자유입니다. 듣고 싶은 수업만 골라서 듣는 것 역시 학생의 자유입니다. 출석체크 그런 거 없습니다. 놀고 싶으면 놀고, 학교 밖으로 외출하고 싶으면 외출을 하면 됩니다. 진도라는 것도 없습니다. 시험은 선택 사항입니다. 학교는 원하는 학생에 한해 시험을 준비해 줍니다. 일 년이든 이년이든 실컷 놀기만 할 수도 있는데 마음이 동하면 언제든 원하는 수업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서 여러 나잇대의 학생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 전혀 이상한 풍경이 아닙니다. 선생님들 역시 몇 명이 수업에 들어오든, 아예 들어오지 않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들어오면 수업을 하고 안 들어오면 다른 일을 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학생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물론 모든 수업은 선생님 주도의 주입식이 아니고 토론식입니다. 그만큼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발표하고 의견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졸거나 딴짓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학생들의 등교나 외출, 조퇴 여부는 복도에 걸려 있는 보드를 보면 파악이 됩니다. 학생들은 등교할 때나 외출 혹은 조퇴를 할 때 각자 개성을 듬뿍 담아 만든 열쇠고리같이 생긴 증표를 해당 보드에 걸어 놓고 학교 안팎을 자유롭게 돌아다닙니다. 자유로운 만큼 아이들의 꿈도 다양합니다. 선생님, 소설가, 정치가, 과학자, 예술가 그리고 미스 잉글랜드에 이르기까지.


샌즈 스쿨엔 교무실이 없습니다. 학교 내의 모든 공간은 학생과 교사 모두를 위한 ‘공동의 공간’입니다. 복사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선생님 옆에서 아이들은 카드게임을 하며 웃고 떠듭니다.


낯을 가리는 아이는 있지만, 예의가 없거나 적대적인 아이들은 없습니다. 학교라는 공동체 생활을 통해 타인을 어떻게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고 배우는 아이들이니 당연하겠지만 ‘격의’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에 나이가 곱절도 더 많은 필자에게 궁금한 것을 묻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샌즈스쿨엔 없는 것이 참 많은데 그중 몇 가지가 ‘교복’, ‘엄숙주의’ 그리고 교장 선생님입니다. 전교생 회의나, 수업시간, 심지어 교무회의에도 ‘엄숙’은 없습니다. 전교생 회의에서 11살 학생이 팔을 베고 누워서 발표하든, 17살 학생이 책상 위에 올라앉아서 이야기하든 아무도 괘념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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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회의에서 어떤 선생님이 탁자 위에 발을 올리고 소파에 반쯤 누워있어도, 찢어진 청바지 차림으로 커피에 비스킷을 담가 먹으며 의견을 말해도 눈살 하나 찌푸리는 이가 없습니다. 모두 말하는 이의 내용에 귀를 기울일 뿐 자세나 복장은 자유롭기 그지없는 모습입니다. 선생님도 다 같은 선생님입니다. 교장은 없습니다.


샌즈 스쿨의 핵심 언어는 ‘민주주의’ 라고 합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적인 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것. 그래서 민주주의적인 사고를 하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민주주의적 시민을 키워내는 것. 그것이 샌즈 스쿨의 목표라고 합니다.


샌즈 스쿨은 비영리 사립학교입니다. 비영리라고는 하지만, 사립학교인 만큼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비용을 감수할 수 있는 부모라야 보낼 수 있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부담하는 학부모도, 교사들도 ‘대학’은 관심 밖에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아이들에게 자유와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사고, 책임감, 감수성, 창의성, 독립심과 자신감, 배려와 존중 같은 기본적 가치를 심어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던 아이들도 꽤 있는데 샌즈 스쿨에서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부모는 행복해합니다. 샌즈 스쿨의 교사나 학부모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위해 오늘을 참고 견디면서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미래는 걱정하지 말고 오늘을 즐기라”고 말하죠. 그래서 아이들은 늘 놀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교사에게 물어봤습니다. 묻기 전에는 절대 들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기합니다. 샌즈 스쿨은 영국 교육청의 감사에서 늘 좋은 평가를 받는답니다. 대학 진학률도 80%에 이르고 꽤 여러 명의 학생이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같은 명문대학에 합격하기도 한답니다. 숀(Sean) 선생님은 그 비결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실컷 놀다 보면 놀이를 통해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게 되고 호기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묻고 그렇게 동기가 형성된 아이들의 집중력은 상상 이상으로 높아서 짧은 기간 엄청난 학습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오늘날 대학은 학업성적만 보지 않습니다. 많은 대학이 샌즈 스쿨 출신의 학생들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이며 성숙하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학업성적이 다소 떨어져도 샌즈 스쿨 학생을 선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으니 답은 해 주는데 “대학이 왜 중헌디?” 하는 투입니다. 대학을 바구니에 담긴 사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맛을 보고 싶은 아이는 집어 들 거고 아닌 아이는 그냥 제 갈 길 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