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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초 홍명희에서 ‘종북’의 비상구를 찾다

신명식 프로필 사진 신명식 2015년 05월 20일

현재 농부 겸 ㈜으뜸농부 대표. 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낸 후 귀촌했다. 유기농 농사를 짓는 한편 농부들이 생산 가공 유통을 직접 해야 농촌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협동조합과 영농법인 등을 통해 실천에 옮기고 있다.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으려면 진실-반성-화해의 절차가 필요하다. 현재 남북관계는 첫 단계의 문턱도 밟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정부가 주관하는 5.18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종북 노래’라고 배척됐다. 이 노래가 처음 만들어진 건 1981년인데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1년 북한이 만든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소위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종북 음악이 되어버렸다. 올해는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기념곡으로 채택하라고 결의했음에도 박근혜 정부는 귀를 꽉 닫았다,


이런 수준의 종북 시비가 계속되면 분단과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 이상의 큰 상처가 우리 민족에게 남을 것이다. 전후 세대들도 제2의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벽초 홍명희 일가에 대한 재조명을 통해 남북이 진실-반성-화해로 나가는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침 5월 23일은 벽초 홍명희가 태어난 날이다. 그는 1887년 충북 괴산군에서 태어나서 1968년 북한에서 타계했다.


벽초가 누구인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운동가이고, 해방 후 북한 내각의 부수상을 지냈으며, 한국 문학사상 최고걸작의 하나로 꼽히는 소설 ‘임꺽정’을 쓴 문인이다.


자식들이 전하는 바로는 벽초는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평생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벽초의 삶 재조명 통해 진실-반성-화해로 나가야


벽초의 고향은 충북 괴산군이다. 괴산에서 벽초는 매우 뜨거운 존재다. 1919년 이후 벽초 일가가 살았던 괴산군 제월리 옛집을 참여정부 시절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재로 등록하려고 했지만, 지역보수단체 반발로 무산됐다.


1998년 제월리에 세워진 홍명희문학비는 2년 후 동판을 뜯어내 ‘월북’ 사실을 추가하는 난리를 겪었다. 수년 전 괴산군이 ‘벽초 신인문학상’을 제정하려다 보수단체 반발로 무산되기도 했다.


벽초의 아버지는 홍범식(1871~1910) 선생이다. 금산 군수로 재직 중이던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날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벽초는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 벽초는 1927년부터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를 이끌었다. 최남선 이광수가 일찌감치 일제에 투항하여 조선 청년을 침략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동안 그는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벽초는 해방 직후 중간파를 결집하여 민주독립당 당수를 맡았다. 벽초는 1948년 4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귀환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부수상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그런데 벽초의 집 안에서 친일파가 나왔다. 홍범식의 부친인 홍승목(1843~1925)이 장본인이다. 홍승목은 구한말 성균관 대사성, 한성부 좌윤을 역임했다. 홍승목은 1907년 2월 친일단체인 대동학회 부회장을 맡았다. 대동학회는 전직 고위관리들이 모인 유교 단체로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았으며 총회 때 그를 초청해 연설을 듣기도 했다.


홍범식이 순국한 후에도 홍승목의 친일행적은 이어진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제월리를 한국 현대사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야


홍승목의 이런 행적 때문에 홍명희가 상속권자인 괴산군 일대 임야 16만 평과 ‘임꺽정’의 산실인 낡은 가옥이 2009년 친일재산으로 결정되어 국가가 환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실 말이 16만 평이지 임야와 그 사이사이에 조성한 옹색한 계단밭이 대부분이다. 관리가 안 돼 잡목으로 덮인 지목상 밭도 많다. 직계 후손도 없고 소유권도 국가에 있으니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사실 제월리 임야는 한국 현대사의 산 교육장이다. 벽초의 증조부로 이조판서를 지낸 임우길의 묘지가 제월리 임야 가장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아래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힌 홍승목의 묘지가, 그 건너편 언덕에는 애국지사 홍범식의 묘지가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벽초의 계모와 제수 무덤도 있다. 벽초가 네 살 때 홍범식과 결혼한 계모 조 씨, 그리고 제수 김 씨는 한국 전쟁때 월북자의 가족이라 하여 우익에게 살해당했다. 벽초의 고모인 홍정식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홍정식의 남편은 임정 국무위원인 조완구로 한국 전쟁때 납북되었다.


이들과 달리 벽초는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벽초의 후손들은 북한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장남 홍기문은 한글학자로 사회과학원 부원장을, 손자 홍석형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를 지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종북 노래라는 딱지를 붙이는 정권과 한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시절, 벽초 일가에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