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완결 지은 ‘친일파의 나라’

신명식 프로필 사진 신명식 2015년 08월 07일

현재 농부 겸 ㈜으뜸농부 대표. 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낸 후 귀촌했다. 유기농 농사를 짓는 한편 농부들이 생산 가공 유통을 직접 해야 농촌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협동조합과 영농법인 등을 통해 실천에 옮기고 있다.

광복 70주년이 다가오는데 황당한 소리가 들려온다. 임시공휴일 지정과 3일 연휴로 9조 원의 경제유발 효과가 있단다.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해 줄 테니 모두 놀러 나가 소비를 진작시키라는데 광복절을 행락 판으로 만들 셈인가? 광복 70년이 놀고먹는 날은 아니다. 특히 ‘친일파의 나라’를 완결 지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앞장서서 광복절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제1~3공화국(1948.8~1972.10)에서 ‘친일파 득세, 독립유공자 괄시’라는 불변의 진실은 다음 자료를 통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에 대한민국의 정·부통령, 국무총리, 장관, 국회 정·부의장, 대법원장·대법관, 검찰총장,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포함하는 핵심요직 414개에 앉았던 사람들의 일제강점기 경력을 보면 각 공화국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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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전체 414개 중에서 26.8%인 111개 자리를 장악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나 판검사 출신,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사람 중에서 요직에 오른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자. 고작 7%인 29개다. 이른바 뉴라이트들은 친일인명사전이 대한민국 건국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제1~3공화국에서 독립유공자들이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객관적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7%대 26.8%가 바로 1~3공화국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이런 분석틀로 각 공화국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제1공화국 독립유공자 11.4% 대 친일파 25.9%


제1공화국의 185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11.4%인 21개 자리에 오른 반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25.9%인 48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대통령·국회의장 이승만/ 국회의장·부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 부통령 이시영·함태영/ 국무총리·국방부장관·내무부장관 이범석/ 농림부장관 윤건중/ 문교부장관 김법린/ 법무부장관 이인·김준연/ 법무부장관·검찰총장 서상환/ 외무부장관 임병직/ 재무부장관 김도연/ 체신부장관 장기영·강인택·이 광 (16명)



부통령 김성수는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그의 친일행위로 인해 서훈 취소 논란이 끝이지 않고 있어 독립유공자 통계에서 제외했다. 국가보훈처는 김성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서훈 취소를 유보한 상태다. 윤치영은 1982년 건국 포장을 받았지만 2011년 4월 언론인 장지연 등과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부통령 김성수/ 부통령·총리 장면/ 총리서리·내무부장관·대법관 백한성/ 교통부·내무부·상공부장관 김일환/ 국방부장관·육군참모총장 신태영/ 국방부장관 김정렬/ 내무부·농림부장관 이근직/ 내무부·법무부장관 이 호·홍진기/ 내무부장관·국회부의장 윤치영/ 내무부장관 김형근·장경근·현석호/ 농림부장관 임문환·정낙훈/ 문교부장관 백낙준/ 법무부장관 조진만/ 재무부장관 인태식/ 국회부의장 김동원·이재학·한희석/ 대법원장·대법관·법무부장관 조용순/ 대법관 최병주·한상범·김두일·김동현·김세완·김갑수·고재호·변옥주/ 검찰총장 민복기·박승준/ 체신부장관·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이응준/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정일권·백선엽·이형근/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이종찬/ 합참의장 유재흥 (39명)



제2공화국 독립유공자 6.8% 대 친일파 32%


단명한 제2공화국의 59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고작 6.8%인 4개에 머문 반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32%인 19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보건사회부장관 나용균/ 체신부장관 최용덕/ 국회부의장 김도연·서민호 (4명)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총리 장면/ 국방부장관 이종찬·현석호/ 내무부·법무부장관 조재천/ 농림부장관 이해익/ 문교부장관 이병도/ 부흥부장관 전예용·김우평/ 부흥부·상공부장관 주요한/ 상공부장관 이태용/ 재무부장관 김영선/ 국회의장 백낙준/ 검찰총장 이태희 (13명)



제3공화국 독립유공자 2.4% 대 친일파 25.9%


일본군 소위이자 만주국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가 만주군 선후배와 정치군인들을 데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제3공화국에서 독립유공자는 가장 푸대접을 받았다.


모두 170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2.4%인 4개 자리에 올랐을 뿐이며,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25.9%인 44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교통부장관 김신/ 외무부장관 최덕신·김홍일/ 국회 부의장 나용균 (4명)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내각수반·대통령 박정희/ 외무부장관·총리 정일권/ 건설부장관 박임항·전예용·이한림/교통부장관 박춘식·백선엽/ 국방부장관 유재흥/ 국토통일원장관 김영선/ 내무부장관 엄민영/ 문교부장관 박일경·고광만/ 내무부·법무부장관 이호/ 보건사회부·체신부장관 김태동/ 외무부장관 김용식/ 체신부장관 홍헌표·김홍식·신상철/ 대법원장 조진만/ 법무부장관·대법관·대법원장 민복기/ 대법관 최윤모·나항윤·방순원·사광욱·방준경·손동욱·한봉세/ 검찰총장 정창운/ 합참의장·국방부장관 임충식 (29명)



이처럼 44개 요직을 차지했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모두 29명인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이 9명이고, 조선총독부의 판검사 출신이 12명, 군수나 시학관 등 관리 출신이 8명이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초급장교·판검사·군수 자리에 앉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해서 제3공화국에 이르자 각 분야의 최고자리에 올랐다.



국방장관 합창의장 육참총장은 친일파 독무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9년 2월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일본군 장교 또는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이 자리는 일본군 대령 출신 이응준이 참모총장을 맡은 이래 일본군 중령 출신 신태영, 일본군 소령 출신 채병덕, 만주국군 헌병 대위 출신 정일권, 일본군 소령 출신 이종찬, 만주국군 중위로 간도특설대 군관 출신 백선엽, 이응준의 사위이자 일본군 대위 출신 이형근, 다시 백선엽이 이어받았다. 이상 7명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도 사정이 다를 게 없었다.


그 이후 상황은 어떠했나? 일제는 1943년 10월부터 학병제를 실시하여 11월 말 지원을 마감하고 다음 해 1월 20일 첫 입영자가 나왔다. 이과와 사범계를 제외한 전문·대학생 4,385명이 일본군에 끌려갔다. 학병 미지원자에게는 12월 15일 징용령이 발동됐다.


학병들은 단기 교육을 받고 현지에서 장교로 임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렇다고 모두 장교를 지원한 것은 아니다. 장준하나 김준엽 같은 사람을 목숨을 걸고 탈주를 해서 광복군에 합류했다.


1959년 2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송요찬은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종전 당시 일본군 준위였다. 이후 제3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12년 동안 육군 참모총장은 학병출신 일본군 소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어받았다. 학병 출신 장교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진기록은 진기록이다.


그렇다면 제1~3공화국에서 육군 참모총장 16개, 합참의장 11개, 국방부 장관 18개를 합쳐서 45개 군부 요직 중에서 광복군 또는 학병 탈출자 출신은 몇 개 자리에 올랐을까? 정답은 단 한 개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1948년 8월부터 1949년 3월까지 국방부장관을 지낸 게 유일하다.



대법관·내무부장관도 친일파 천지


제1~3공화국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 자리는 모두 45개였다. 이 중에 47%인 21개를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들이 차지했다.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고 수많은 항일사건을 변론했으며, 해방 후 1948년 8월부터 1957년 12월까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가 유일하다.


검찰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검찰총장 11명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애국단 사건으로 투옥됐으며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했고, 해방 후 1950년 6월에서 1952년 3월까지 재임한 서상환이 유일하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4명이다.


한편 치안과 지방행정을 지휘했던 내무부장관도 친일인사가 득세했던 자리다. 제1~3공화국에서 내무부장관은 중복 임명을 포함해서 30명인데 이 중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가 13명이고, 독립유공자는 이범석 단 한 명뿐이다.


이렇듯 1~3공화국에서 친일파 득세, 독립유공자 괄시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역했던 사람이나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외면했던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은 이런 점에서 커다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입맛대로 미화한다고 해서 없었던 정통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1~3공화국 특히 제3공화국이 정통성이 결여됐다 하여 21세기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모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이룩한 성과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화해하는 길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진실-반성-화해를 모색해야 할 날에 3일 연휴, 경제유발효과 9조 원을 외치는 박근혜 정권이 그저 한심하고 딱할 따름이다. 하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