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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은 왜 법률기술자가 되었나

신명식 프로필 사진 신명식 2014년 11월 26일

현재 농부 겸 ㈜으뜸농부 대표. 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낸 후 귀촌했다. 유기농 농사를 짓는 한편 농부들이 생산 가공 유통을 직접 해야 농촌이 살 수 있다는 믿음을 협동조합과 영농법인 등을 통해 실천에 옮기고 있다.


(조선총독부 시절) 조선인 판사가 항일운동 재판을 했다하여 우리 민족을 탄압한 것은 아니다.
(유신시절) 당시에는 위헌이 아닌 긴급조치에 따라 재판한 법관이 불법행위를 했다고 볼 수 없다.



2010년 10월 해괴한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김종필 부장판사가 장본인이다. 김 판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판사 유영(柳瑛·1892~1950)의 손자가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유영은 1920년부터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직하면서 독립운동가 수십 명에게 유죄를 선고한 까닭에 정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됐다.


유영은 의열단 사건 관련자에게 실형을 선고하는 등 조선총독부 판사로 재직하는 22년 동안 독립운동가 77명(사건 7건)에게 유죄판결을 했다. 유영이 유죄를 선고한 피고인 가운데 25명은 대한민국 수립후 독립유공자로 선정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판사는 검사가 공소제기한 적용 법령과 공소 사실을 기초로 유무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하는 역할만을 한다”며 “판사가 항일운동에 관련된 사안에 대한 재판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무고한 우리 민족 구성원을 탄압하는 데 적극 앞장섰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렇듯 조선총독부 판사의 반민족행위를 적극 옹호했던 김 판사는 올해 초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발탁됐다. 박근혜 정권의 속성을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후배법관의 양심을 걷어찬 대법관들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며 법치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이게 일반상식이다. 그를 위해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한편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면 차관급 예우를 해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법원에는 영혼 없는 법률기술자로 전락한 법관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대법원 2부(주심 이상훈, 조희대, 신영철, 김창석 대법관)가 최근 내린 판결은 김종필 판결문과 싱크로율 100% 복제판이다.


박정희 통치시절 긴급조치 9호로 구속됐으나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자 지난 10월말 대법원2부는 “긴급조치 9호를 근거로 영장 없이 피의자를 체포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에 넘긴 수사기관의 직무행위와 유죄 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직무행위는 불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긴급조치9호는 2013년 3월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위헌 결정이 나왔다. 그런데도 대법관들은 ‘현행법’이었던 긴급조치를 충실히 적용하고 수사, 기소, 유죄 판결한 검사와 판사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고문과 같은 위법행위가 없는 한 국가배상책임도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들이댔다.


긴급조치 관련 재심을 맡은 대부분 법관들은 “과거 유신시절 선배법관들이 여러분에게 고통을 준 것을 대신해서 사과한다”고 했다. 대법원2부 대법관들은 이런 후배법관들의 양심을 걷어찬 셈이다.



“공부 잘한 게 죄냐” 항변하는 친일 판검사 후손들


법조계 성골 진골인 이들의 반역사적이고 이기적이며 폐쇄적인 사고체계는 도대체 어떻게 형성됐을까?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의 최종 수록자를 결정할 때 편찬위원들이 가장 고심한 게 사법 분야다. 이의신청과 소송을 제일 많이 제기한 부류가 판검사나 고등 관료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공부 잘해서 고등고시에 합격한 것이 죄냐”고 주장했다. 친일 법조인과 그 가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주장 하나를 인용한다.




일제의 지배하에 있던 당시 한국 청소년의 꿈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고 가족을 거느리며, 본인이 품은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데 있었을 것이며…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엘리트 계층은 국내의 일류대학에 입학해서 열심히 인격도야와 학문연구에 온 힘을 쏟았고…선친께서도 열심히 공부한 끝에 부모의 바람과 노력이 합쳐져서 그 어렵다는 고등고시를 합격하였습니다. 일부러 친일파가 되기 위해서 고시에 합격했다고 볼 수 없지 않습니까? 머리가 남보다 뛰어나고 노력도 월등한 수재이기 때문에 주저 없이 자신의 전공에 맞는 검사를 선택하신 것으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문관고등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 합격하면 판검사나 군수 자리에 올라서 부와 권력을 쥘 수 있었다. 사법과에 합격한 조선인이 272명, 행정과에 합격한 조선인이 140명(사법·행정 양과 합격자 포함)정도다.



‘유신의 문지기’ 노릇을 한 대법원장


행정과 합격자 134명을 분석한 논문은 이들 중 80%인 96명이 20대에 합격했으며, 관료로 진출한 96명의 경우 빠르면 1~2년, 길어야 4년 안에 군수로 승진했다고 밝혔다. 그야말로 ‘20대 영감님’이다.


해방 후 134명의 55.2%에 해당하는 74명이 이승만 정부시절 행정(56명) 사법(5명) 입법(5명) 지방행정기관(8명)의 공직에 기용됐다. 특히 이들 134명 중에서 국회의원 등 정치활동을 한 사람이 33명, 장차관까지 오른 사람이 32명이 나왔다.


한 연구논문은 일본 문관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조선인을 272명 이상으로 파악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총독부 판검사에서 해방 후 대한민국 판검사로 변신을 했고, 그들 중 일부는 검찰총장, 법무장관, 대법관으로 승승장구했다.


특히 경술국적 민병석의 아들 민복기는 1937년 11월 일본 문관고등시험 사법과에 합격해서 조선총독부 판사를 지냈다. 민복기는 해방 후 검찰총장과 법무부장관을 거쳐 1968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대법원장을 연임했다. 민복기가 대법원장으로 있는 동안 사법부는 ‘유신의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이렇듯 친일과 유신의 후예인 법률기술자에게 ‘법’은 암흑의 권력을 안겨주는 절대반지와 같은 존재다. 그 법이 조선총독부법인지 유신헌법인지 상관없다. 이런 영혼 없는 법률기술자들이야말로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공공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