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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정의의 법정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백병규 프로필 사진 백병규 2015년 05월 28일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


그런 X들을 그냥 가만히 두어요. 나라면 그냥 안 있을 거예요. 너 죽고 나 죽자 라고라도 하지…



30대 후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택시 운전기사는 씩씩거리며 마치 자기 일인 양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전 새벽 1시, 밤늦게 귀가하는 택시에서 우연히 나온 ‘강기훈 이야기’가 이 젊은(?) 택시 기사의 화를 돋웠다. 반전이었다.


그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사이에서도 ‘강기훈’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한때는 만나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목청을 돋우던 사람들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시시콜콜한 잡담이 술좌석 대부분을 차지한 지 오래다. 가끔 아이들 이야기도 나오곤 하지만, 자기 이야기도 좀체 안 한다. 헛헛한 기분에 택시 기사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강기훈 이야기가 나왔다. 대법원 재심 결정에서 24년 만에 무죄가 확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런 X들을 그냥 가만히 두나”


강기훈, 그 이름은 언뜻 뉴스에서 들어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간암까지 얻어 건강을 망친 상태에서 24년 만에 어렵사리 결백을 인정받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느낌이 어땠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별로’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한 번은 유죄라고 판단했다가 이번에는 무죄라는 판단을 내렸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유서 대필, 진실은 무엇일 것 같으냐고.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하지 않았을까요?”


멍했다. 무엇을 했다는 것인가? 이 작자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러잖아도 취기도 꽤 있던 때에 울컥 속에서 감정이 복받쳤다.


“유서 대필을 한 것 같다고요?”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대법원에서는 왜…”


“……”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강기훈 사건에 대해 아시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고 했다. 얼핏 뉴스에서 들은 게 전부라고 했다. 강기훈보다 더 젊은 이 기사에게 강기훈 사건은 기억에 없었다. 얼핏 들은 뉴스에서 ‘무죄’라는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강기훈 사건이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요즘 세상에 뭐 믿을 게 있느냐는 반문이었다. 사법부는 24년 만에 자신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았을지 모르지만, 세상까지 그것을 바로 잡은 것은 아니었다.


강기훈 사건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이 시작됐다. 90년 3당 합당, 91년 분신 정국, 그리고 이른바 유서 대필사건…. 택시 기사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괜히 한마디 했다가 술 취한 승객의 넋두리 대상이 된 것 아닌가 싶었을 것 같다.


그러던 택시 기사의 반응이 조금씩 달라졌다.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 필적 감정을 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담당자(김형영 전 문서분석실장)가 그 후 토지 사기사건과 관련해 구속까지 됐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부터 반응이 달라졌다. 그가 사기단의 문서를 허위 감정한 게 거의 분명하지만, 검찰은 이를 눈감아주었다는 대목에선 “그랬을 것”이라고 맞장구까지 쳤다. 강기훈이 24년 만에 누명을 벗긴 했지만, 간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하자 그가 물었다.


“그 때 그 사람들 뭐라고 해요?”



국과수 필적감정 신뢰성 뒤흔든 토지사기사건 외면한 검찰과 법원


8년 전 똑같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2007년 11월 1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국가의 재심을 요구하는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2년 전 경찰청 과거사위원회에 제출된 김기설의 ‘노트’와 ‘낙서장’의 필적 감정 결과 유서의 필적이 김기설의 필적이라는 국과수의 새로운 감정 결과가 나온 직후였다. 그때 생각났던 사람들이 국과수 김영형 전 문서분석실장의 감정 사기 행각을 취재해 단독 보도했던 MBC 기자들이었다.


1992년 2월 9일 일요일. 사람들이 ‘뉴스’보다는 ‘주말연속극’에 주목할 때 MBC 저녁 9시 뉴스데스크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문서위조단이 적발됐다는 보도였다. 그것도 국과수 필적감정 전문가가 천억 원대의 토지 사기사건에 돈을 받고 문서를 허위로 감정해주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서 필적을 감정했던 김영형 문서분석실장이었다. MBC 사회부 홍순관 기자가 몇 달간의 잠행 취재 끝에 건져 낸 단독보도였다. 사내에서도 사건취재팀장(김택곤 차장)만 알 정도로 극비 보완 속에 진행된 취재였다. 사건 보도에 촉각을 곤두세운 방송사 윗선의 민감한 반응 때문에 안팎의 감시 눈길이 조금은 느슨한 일요일에 기사를 내보낼 수 있었다.


파장은 컸다.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다. 경찰은 김 씨는 1년 전에 이미 문서 전문위조단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경찰의 수사 선상 오른 바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경찰 수사는 돌연 중단됐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발동된 것.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발생했을 즈음이었다. 강기훈 사건의 결정적인 물증이었던 필적 감정 결과의 신뢰성이 뿌리부터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김 씨를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만 구속기소했다. 허위 감정은 하지 않았다는 것. 홍순관 기자가 “돈을 주면 김 씨로부터 허위 감정을 받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는 브로커의 녹취까지 땄지만, 무시됐다. 당시 강기훈에 대한 재판은 진행 중이었다. 법원은 이 사건을 못 본 척했다. 결국, 강기훈의 유죄를 확정하고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과거사위원회가 국가에 재심을 요구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였다. 홍순관 기자는 그때 MBC 사내 벤처 스토리 허브의 사장이 돼 있었다. 그에게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요구 결정 소식을 전하면 소감을 묻자 그의 첫마디가 그랬다.




그때 그 사람들 뭐라고 그래요? 김형영 씨, 그때 강기훈 씨 수사했던 검사, 그리고 판결 내린 판사, 그분들 뭐라고 그래요?



검찰은 법원 탓…법원은 검찰 탓?


뭐라고 했을까. 사건을 지휘했던 서울지검 강력부장이었던 당시 강신욱 변호사(후에 대법관)는 ‘난센스’라고 일축했다.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한 사건을 갖고 10년 뒤에 왈가왈부하는 게 ‘난센스’라고 했다. “특정 단체가 입맛에 맞는 결론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다른 검사들도 대동소이. 필적 감정을 했던 김영형 씨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절대 수긍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강신욱 전 대법관은 침묵이다. 김기설의 흘림체를 강기훈의 정자체와 비교해 필적감정의 기본도 지키지 못했던 김형영 씨는 “아무 할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남기춘 변호사는 “현재의 척도로 옛날에 한 판결을 다시 하면 결론이 달라질 것”이라며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임철 변호사는 “검찰은 수사하는 기관이지 판단하는 기관이 아니다. 법원이 1.2심에서 그런 걸(필적감정이 잘못된 것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그건 법원 잘못”이라고 법원에 책임을 돌렸다.


그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사법부나 당시 강기훈을 비롯해 운동권을 패륜 집단으로 몰아간 언론이나 시인, 총장 그 모두가 그렇다. “궁극적 진실은 강 씨 본인이 아는 것”이라는 조선일보의 사설은 그 정점을 찍는다. 그들은 대법관도 되고, 청와대 요직을 꿰차는 등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대법원의 재심 판결은 그래서 미완의 판결이다. 조작의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정의의 법정은 열리지도 않았다. 한 시민모임과 1991년 전국대학생협의회(전대협) 집행부는 관련자들에게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과 책임자 처벌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한 수사를 저지하고, 공안사건 기획을 통해 정당 해산에 앞장선 이가 국무총리 후보자가 되는 세상에서 그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잊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 기록하는 것, 공유하는 것…. 시민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하나씩 해나가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서울 한복판에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기록관’이라도 하나 내는 것은 어떨까. 뜻 있는 시민들이 힘닿는 대로 정성을 모아 ‘역사의 법정’이라도 준비해나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