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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배반한 청와대

백병규 프로필 사진 백병규 2014년 12월 11일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투표를 했는데, 요즘 실망이 크다.



한 달 전쯤 한 택시 기사분의 말이다. 국민안전처장에 군 출신이 임명됐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한 말이다. 60대 후반인 이 개인택시 기사분은 박 대통령에게 실망한 가장 큰 이유로 ‘인사 문제’를 거론했다. 너무 군 출신을 많이 기용하고, 지역적으로도 편중돼 있다는 지적이었다. 대통령이 됐으면 지역 화합 차원에서라도 인재들을 두루 기용해야 할 터인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푸념이었다. 아마도 아버지 영향 때문에 그런 것 아닌가 싶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모르긴 몰라도 박 대통령을 찍었다가 실망한 많은 사람들의 반응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그래서였을까. 청와대의 이른바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보고서’가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됐을 때 그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설마’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은. 검찰 수사는 예견됐던 결론을 향해 가고 있다.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수사 내용으로 보면 대통령의 ‘지침’ 대로 시중에 떠돌던 풍문을 짜깁기한 ‘찌라시 문건’으로 낙찰될 공산이 커 보인다. 당사자들이 모두 회동 사실을 부인하고, 문건의 결정적 제보자마저 ‘풍문’을 전해준 것뿐이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하니, 다른 명백한 물증이 나오지 않는 한 검찰의 수사 결과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숱한 의문들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상식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어떤 곳인가? 최고 권부의 서슬 퍼런 감찰 부서이자 청와대의 마지막 게이트키퍼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시중의 풍문들을 짜깁기한 수준의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보고했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그것도 문건으로. 비서실장에게 보고했다는 것은 곧 대통령에게 보고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건을 작성하고 보고한 박관천 경정이나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모두 경찰과 검찰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특수수사통 출신이다. 그런 이들이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들을 정조준한 문건을 엄밀한 확인 과정 없이 비서실장에게 보고했었다는 게 우선 상식과 배치된다.



최고의 감찰부서에서 찌라시를 만들었다?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보자인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자신의 정보력과 영향력 등을 과시하기 위해 시중에서 떠돌던 풍문을 전달한 것을 박관천 경정이 짜깁기해 소설을 써 보고서로 작성했던 것일까? 이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연락책과 회동장소, 게다가 제보자가 모임의 스폰서 역할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문건의 신빙성이 6할 이상”(조응천 전 비서관)이라는 판단하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것 아닌가.


보고서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든 구석도 많다.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비서관 3인을 비롯해 그 바쁜 청와대 비서관과 행정관들이 한 달에 두 차례씩이나 외부에서 회동을 하고 정윤회 씨를 만났다는 것 역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정윤회 씨야말로 대통령 비서실장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막후 권력의 실세 중 실세라 할 만하다. 정 씨가 이들 비서관들과 통화 몇 통 한 것, 설령 개별적으로 접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국정을 농락했다고 볼 일은 아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과거에 자신들을 영입하고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필했던 인연으로 볼 때 이들 비서관들이 정 씨와 연락도 하고 접촉을 가졌다고 해서 사시로만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그 자리에서 문건에 나온 것처럼 비서실장 등의 경질을 모의했다면 이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바로 그래서 의문이다.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에서 그런 문건을 작성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까지 했는데 김 비서실장은 그것을 묵살했다는 것 아닌가. 역시 시중에 떠돌던 ‘찌라시’ 수준의 풍문으로 간주했다는 게 김기춘 비서실장의 뒤늦은 해명이다. 설령 그렇게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최소한 보고서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조사와 확인과정이 필요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바로는 보고서 내용의 검증이나 확인을 위한 그 어떤 조치가 취해졌다는 가시적인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찌라시 수준의 동향 보고’라는 청와대 해명이나 검찰의 수사 결과 여하와 무관하게 의혹이 증폭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국정혼란, 그 진원지가 어딘데…


비선 실세 국정개입 의혹 문건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된 직후 박관천 경정이 사실상 경질(경찰 복귀)된 것, 몇 달 뒤 조응천 비서관도 경질된 것, 그 후 공직기강비서관실의 거의 전원이 물갈이된 것이 이 보고서에 대한 청와대의 최종 판단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같은 경질이 찌라시 수준의 첩보를 무책임하게 올린 것에 대한 문책 인사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것 같다. 세계일보의 보도로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보고서’가 공개된 후 조응천 전 비서관이나 박관천 경정이 보인 태도가 그 반증이다. 이 두 사람은 여전히 보고서의 내용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청와대의 내부 조사 등을 통해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무근으로 판명 났다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사태를 이 지경으로 키운 것은 바로 청와대다. 그중에서도 보고를 받고도 이를 ‘정치적’으로 처리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청와대에서 벌어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개연성이 커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 “겁나는 일이나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에 흔들릴 이유도 없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지난 7일 새누리당 지도부와 당 소속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들과 청와대에서 함께 한 오찬 자리에서다. “찌라시에나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에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는 것은 정말 대한민국이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우리 경제가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소모적인 의혹 제기와 논란으로 국정이 발목 잡히는 일이 없도록 여당에서 중심을 잘 잡아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말 중심을 잘 잡아야 할 곳은 바로 청와대다. 그 정점에 박 대통령이 서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터. 지금처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청와대에서 계속 벌어진다면 그것만큼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트릴 일도 없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는 한 택시기사의 소박한 바람처럼 그 정치적 지지자들의 믿음과 상식까지도 배반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