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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영업비밀’인가요?

홍여진 프로필 사진 홍여진 2015년 05월 21일

내 일이든 남 일이든 부당한 거, 억울한 거 절대 못 참아 기자가 된 뉴스타파 공채 1기. '상식'이 '비상식'을 지배하는 날을 기다리다... 오늘도 야근!

‘박근혜 표 세일즈외교 줄줄이 ‘꽝’’ 취재 후기



기자님이시죠? 저 보잉 홍보대행사 담당자인데요.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



지난 15일 이른 아침. 전날 ‘박근혜표 세일즈외교 줄줄이 ‘꽝’’이라는 리포트를 내보낸 후 아직 잠에 빠져있던 때였다. 지난 2년 간 13차례에 걸쳐 33개국 ‘해외순방’을 한 박근혜 대통령의 성과물을 취재하느라 무궁화호와 KTX를 번갈아 타며 ‘지역순방’을 했던 나는 좀 더 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잠을 깨우는 휴대폰 문자메시지의 알람 소리... 회사였다. 보잉사 홍보대행사 담당자로부터 연락을 달라고 전화가 왔다는 내용이었다. 보통 보도를 한 다음 날 기사에 언급된 곳에서 오는 전화는 반갑지 않다. 추가제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왜 보도를 내보냈느냐는 항의전화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잉사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방미 당시 해외 투자 유치를 해왔다고 홍보했던 7개 기업 중 하나이고, 유일하게 현재도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곳이라고 보도했던 기업이 아닌가? 나에게 전혀 항의할 이유가 없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홍보대행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자 : 무슨 일이시죠? 혹시 저희 보도에 무슨 문제라도...
보잉 홍보담당자 : 아뇨 기자님, 다름이 아니고 저희가 투자를 한 건 맞는데요. 1억 2,000만 달러가 아니고 그냥 2,000만 달러에요.
기자 : 네? 아니 그건 제가 임의로 쓴 게 아니고 정부 보도자료에 나온 내용인데요.
보잉 홍보담당자 : 그거 잘못된 거예요. 저희가 2,000만 달러 투자한 건 맞는데 1억 달러는 말한 적이 없어요.



리포트 중간에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 보도자료를 촬영한 화면이 있는데, 거기 적혀있는 보잉사의 국내 투자금액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산자부가 박 대통령 방미 이후 발표한 보도자료에는 분명 보잉사가 경북 영천에 항공정비센터를 짓는 명목으로 초기 2,000만 달러, 시설확대 후 1억 달러를 투자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은 산자부 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항공정비센터가 설립되는 경북 영천시 홈페이지에 현재도 올라와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투자금액 가운데 2,000만 달러를 제외한 1억 달러는 보잉이 약속한 적도, 방미 때 투자신고식에서 신고한 금액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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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 그럼 1억 달러는 어떻게 나온 숫자일까요?
보잉 홍보담당자 : 저희도 모르겠어요. 저희는 2000만 달러만 투자신고를 했는데 계속 1억 달러라는 숫자가 나오더라고요. 매번 고쳐달라고 말하는데 잘 안 고쳐지더라고요. 그래서 일일이 기자님들께 전화 드리고 있어요.



아뿔싸! 지난 취재에서 나의 관심은 정부 발표대로 실제 국내에 투자가 이뤄졌는지에 쏠려있었다. 애당초 정부가 발표했던 투자금액 자체가 허위이거나 틀릴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정부 발표를 조금이나마 신뢰했던 게 나의 실수였다.


변명을 보태자면, 산자부는 대통령이 해외를 순방하며 유치했다던 투자 실적들의 추후 진행 상황을 모두 ‘영업비밀’에 부쳤다. 투자가 이뤄졌는지 아닌지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일이 해당 지자체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고, 투자가 아예 이뤄지지 않은 곳의 경우에는 기업 측에 다시 확인 전화를 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보잉사의 경우, 경북 영천시 관계자는 내게 실제로 항공정비센터가 완공됐고, 2,000만 달러의 투자가 이뤄졌다는 답도 했다. 1억 달러 투자도 단계적으로 이뤄질 것이라 장담했다. 투자가 전혀 이뤄지지 않은 다른 곳에 비해 양호한 상황이라 ‘투자진행중’으로 판단하고 보잉사 측에 따로 연락하진 않았던 게 내 불찰이었다.


그렇다면 1억 2,000만 달러 가운데 1억 달러는 대체 어디서 나온 숫자일까? 결국, 보도자료를 낸 산업통상자원부 측에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자 : 보잉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1억 달러는 투자신고를 한 적이 없다는 데 어떻게 된 건가요?
산자부 투자유치과 : 구체적인 내용은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 없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는데요.
기자 : 아니, 기업에서 전화가 왔어요. 정부 자료가 잘못됐다고, 그건 설명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산자부 투자유치과 :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뚝...



결국, 1억 달러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기업이 나서서 정부 보도자료가 잘못됐다고 말하는데 ‘기업 영업비밀’이라며 보도자료 내용의 사실 여부조차 확인해 주지 않는 산자부의 태도는 참으로 무책임하다. 자신들이 홍보한 내용이 잘못됐다는데 고작 한다는 변명이 ‘영업비밀’이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말인가?


산자부가 그토록 영업비밀이라며 비공개하는 근거는 ‘외국인투자촉진에 관한 특별법(외촉법)’이라고 한다. 외촉법 제24조에는 “외국인투자에 관한 자료·통계 등을 수집·작성하는 공무원은 해당 기업의 영업비밀과 관련된 정보를 누설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산자부는 대통령 순방으로 인한 투자유치성과라며 보도자료를 낼 때는 관련 기업들이 어디인지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명기해 놓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이 실감 났다. 대통령 입맛에 달면 외촉법에 상관없이 적당히 부풀려서 홍보하고 대통령 입맛에 쓴 내용은 외촉법을 근거로 어떻게든 밀어버리려는 관료들의 ‘보여주기식 성과주의’의 전형이다.


1억 달러 투자계획은 밝힌 적이 없다는데 이 사실을 계속 확인해 주지 않는 정부나 한국 언론에 대해 보잉사의 홍보대행사 담당자도 답답했었나 보다. 정부에 왜 이런 보도자료가 나가게 됐는지 직접 확인해보라고 조언해주자 보잉사의 홍보대행사 담당자는 경북 영천시와 산업통상자원부에 ‘1억 달러’ 보도자료의 경위에 대해 질의했다. 결과는 비슷했다. 보잉사 홍보대행사 담당자의 푸념이다.




정부 측에 문의했는데, 아직 답변이 없네요.



언론에 홍보성 보도자료를 뿌릴 때는 영업비밀을 무시하고, 언론이 사실 여부를 물어볼 때는 영업비밀이다. 심지어는 해당 기업이 왜 이런 보도자료가 나가게 됐는지 확인해 달라고 해도 대답이 없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희한한 정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