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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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를 위한 연애스쿨

김민식 프로필 사진 김민식 2017년 04월 11일

MBC 드라마국 PD / SF 덕후 겸 번역가 / 시트콤 애호가 겸 연출가 / 드라마 매니아 겸 PD

탄자니아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세렝게티 사파리 마지막 날 마사이 족 마을에 갔어요. 입장료를 내는 민속촌 같은 곳이에요. 손님이 오면 마을 주민이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마사이족 전사의 춤은 독특합니다. 제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어오릅니다. 실제로 해보니 쉽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춤을 추고, 여자들은 손을 잡고 빙 둘러서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하! 이게 나름의 짝짓기를 위한 정보 제공 시간이구나!’


마사이족 남녀가 연애할 때,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는 무엇일까요? 남자가 사냥할 때 얼마나 잘 달리느냐 아닐까요? 사슴을 잡으러 뛸 때나, 사자를 피해 달아날 때나, 세렝게티에서는 달리기 실력이 필수입니다. 얼마나 잘 달리는지 보려고 초원에서 달리기 경주나, 사자 콧등치고 돌아오기 내기를 할 수는 없어요. 짝짓기 욕심에 너무 멀리 갔다가 영영 못 오는 사람이 생길 테니까요. 사냥을 잘하는 사람이 짝짓기에 유리하다고 하면, 사냥할 때 서로 경쟁하느라 협력을 등한시할 겁니다. 사냥에는 모는 사람도 있고 잡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달리기 시합도 안 되고, 사냥 실력으로 겨뤄도 안 되니, 결국 춤으로 남자의 체력을 봅니다. 제자리높이뛰기 춤은 체력과 스태미나를 알아보는 최고의 수단이에요. 잘 뛰는 남자를 만나야 사냥도 잘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어요.


남자에게 중요한 정보는 여성의 호감도입니다. 나에게 호감을 보여주는 여자를 찾아야 하는데, 일상생활 중에는 부끄러워서 여자랑 눈 마주치기도 쉽지 않지요. 여자들이 무리를 지어 둘러선 가운데 한복판에서 춤을 추면, 자연스레 주변 여자들과 눈이 마주칩니다. 내가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잘 웃어주는 여자를 기억해둬야 합니다. 그래야 짝짓기 가능성이 커지니까요. 마사이족의 춤과 노래는 평화롭고 즐거운 방식으로 짝짓기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시간입니다.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위들이 문화로 만들어지는데요. 그런 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일부 청년들의 인터넷 문화에서 드러나는 ‘여성 혐오’ 현상입니다. ‘일간베스트’ 사이트에 여성을 비하하는 글이나 사진을 올려 사람들을 웃기고 공감을 얻는 건 정말 이해가 안 가요. 짝짓기 전략에 있어 자살 행위거든요. 연애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대수냐 싶겠지만, 최근 논란이 된 KBS ‘일베’ 기자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듯, 인터넷에 남긴 흔적은 언제든 드러납니다. ‘구글신’은 모든 걸 지켜보고 기록해둡니다. 언젠가 나의 여자 친구, 아내, 딸이 그 글을 본다고 생각해봐요. 함부로 쓸 수 없는 글입니다. ‘여성 혐오’는 연애에 있어 최악의 전략인데요.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는 걸까요?
20세에서 34세 사이 인구에서 성비 불균형이 심각합니다. 한창 연애를 할 시기인데, 잉여 남자의 숫자가 47만 명이래요. 연애를 못 하고 결혼의 희망도 없는 50만 대군이 갑자기 생겨났습니다. 내가 연애를 못 하고 결혼을 못 하는 건 심각한 성비 불균형 탓이에요. 그런데 큰 그림은 보이지 않습니다. 데이트에서 많은 비용을 쓰게 하는 여자들 때문에 연애를 못 한다고 생각하지요.


진화심리학을 보면, 여자는 난자에 투자하는 것이 많으므로, 상대를 까다롭게 고르고, 남자는 정자에 투자하는 것이 적으므로 더 많은 기회를 노립니다. 여자 입장에서 보면 함께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있어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남자를 선택해야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수 있어요. 수컷 공작이 거추장스러운 큰 꼬리 장식을 만든 이유는 암컷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서예요. 포식자의 눈에도 잘 띄고, 도망가기도 힘든 그 무거운 꼬리를 뒤뚱뒤뚱 끌고 다닙니다. 그러나 암컷을 보면 활짝 펴서 그 아름다운 꼬리를 뽐내지요. 수컷 공작은 목숨 걸고 사랑합니다. 공작 수컷의 꼬리 같은 사치재가 인간에게는 과시적 소비로 나타납니다.


베블렌은 <유한계급이론>에서 현대에 와서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의 ‘과시적 소비’가 늘었다고 합니다. 옛날 시골 부자들은 굳이 사치할 필요가 없어요. 그 동네에서 누가 부자인지, 누가 소작하는지 다 아니까요. 하지만 한양 나들이 갈 때는 사치를 합니다. 비단옷으로 빼입고 말 타고 종놈 견마 잡히고 갑니다. 대도시에서는 오로지 과시적 소비만이 부의 지표가 되니까요.


‘일베’의 여성 혐오가 처음 나타난 계기가 무엇일까요? 스타벅스 가서 비싼 커피 시키는 여자, 비싼 외제차를 끌고 거리에 나온 여자, 된장녀와 김여사에 대한 글이 시작이었어요.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남녀 간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었는데, 왜 아직도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전부 대는가 하는 것도 불만이었지요.


선진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외국인 노동자와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늘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체제로 인해 취업 시장에서 소외된 결과,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미국의 월가 시위와 유럽과 남미 젊은이들처럼 분노가 터져 나온 거지요. 영국의 ‘브렉시트’나 미국의 ‘트럼프’ 현상이 그렇지요. 결국 극우 청년들은 체제의 실패로 인한 좌절과 분노를 주위 약자에게 돌립니다. 한국에서는 길 잃은 분노가 여성을 향한 혐오로 나타났고요.




(극우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실패한 사랑과 인정을 또래의 젊은 여성에게로 돌린다.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를 그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은 여성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들이 원하는 요구 조건들이 속물적이라 비난하며, 그 곳에서 타자의 잣대, 현실의 기준, 집단적 편견을 지목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안에 들어 있는 집단성, 속물성, 비열함을 응시하는 데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분노사회> (정지우 / 출판사 이경) 97쪽

여성이 연애를 할 때, 남성이 가진 조건을 보는 것은 진화의 산물이자 문화적 유산입니다. 지금 나타난 극심한 남녀 성비 불균형은 2, 30년 전 출산을 앞둔 기성세대가 아들을 선호한 결과이고요. 지난 수십 년 사이, 부동산의 가격과 사교육비가 껑충 뛰었어요. 남자 혼자 벌어서는 가계를 유지할 수 없어요. 그 결과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났습니다. 일하는 엄마들은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여전히 육아와 살림의 짐을 맡아야 했지요. 그런 엄마의 삶이 불행했음을 아는 딸들이 이제는 자라나 ‘비혼’을 선택합니다. 우리 시대 젊은 여성은, 영아 살해를 피해 어렵게 태어나, 맞벌이가 대세인 시대에 일터로 내몰리고, 직장에서는 성차별과 싸우며 힘들게 일하는데, 정작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낙오한 남자들의 분노와 혐오까지 견뎌야 하는 겁니다.




(극우는) 특정 지역을 비하하고, 상대 진영을 조롱함으로써 희열을 느낀다. 타자를 공격하고 훼손시키는 조롱과 멸시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우월해졌다는 느낌, 열등한 자들에 대해 지배적인 위치에 올라섰다는 고양된 기분을 느낀다. 타자에 대한 증오는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자기감, 자기 확신, 자기가 힘을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들은 특히 좌파들의 자기도취적 정의감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서 가장 큰 희열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자기모순을 직시하거나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즉각적이고 가장 강렬한 도취감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분노사회> 98쪽

얼마 전 회사 앞에서 황당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MBC 앞에 몰려온 할아버지들이 ‘언론 노조 빨갱이들 때려죽이자’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어요. 언론 공정성을 담보하라는 노동조합의 게시물을 훼손하고, 말리는 노조원에게는 커터 날을 휘둘렀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보수가 되는 건 평생 살아온 삶을 긍정하기 때문이랍니다. ‘내가 평생 열심히 일한 덕에 우리나라가 이 정도로 발전을 했는데 왜 젊은 애들이 이것도 부족하다고 난리냐. 이 나라가 뭐가 문제냐?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북한에 가라.’ 뭐 이런 거지요.


언론노조 MBC 조합원인 저는, 언론의 자유가 없고, 3대째 권력을 세습하는 북한의 독재 정권을 정말 싫어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어르신들이 만든 이 나라를 부정하지 않아요.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조국이 언론 자유의 나라, 부정부패 없는 나라, 정의가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갑니다.


태극기 집회 노인은 과거를 봅니다. 이제껏 살아온 날을 부정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촛불 시민은 미래를 봅니다. 아이들이 더 안전한 나라를 꿈꿉니다. 아이 잃은 부모가 유해라도 찾아달라고 목숨 걸고 단식할 때 함께 울어주는 나라를 원해요. 그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하는 나라가 아니고요.


‘일베’ 청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온 날이 더 많은가요, 살아갈 날이 더 많은가요? 지금 연애를 못한다고, 평생 안 하고 살 건가요? 이성을 향한 무분별한 분노는 결국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미래의 가능성도 막아요. 분노 대신 희망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지금 내가 가진 패배감은 내가 못난 탓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시절 인연 탓입니다. 자신을 좀 더 아껴주길 바랍니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연애는 나를 향한 긍정, 상대를 향한 공감에서 출발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