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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타락, 전문가의 죽음

이태경 프로필 사진 이태경 2016년 10월 05일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 칼럼니스트

이명박 시대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한국사회의 바닥을 봤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바닥 아래 지하실이 있었다. 박근혜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인류가 누대로 쌓아온 상식과 양식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을 너무나 많이 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면서 주권자인 국민에게만 충성하고 봉사해야 할 공무원(대한민국 헌법이 공무원들의 신분을 보장하는 건 그 때문이다. 대통령이 공무원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들이 박근혜 치하에서 한 짓거리들을 보면 직업공무원제도의 정당성과 효용성이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공무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정말 난감하다.


간첩 잡고 국가안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랬더니 박근혜 당선을 위해 댓글이나 달고 앉아 있던 국정원 및 사이버사령부 공무원들. 수백의 우주가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눈 버젓이 뜨고 사실상 아무런 구조도 못한 해경공무원들, 세월호 특조위에 파견돼 '협조'는 커녕 '방해'를 줄창 해던 공무원들(세월호 특조위 1년여…‘파견 공무원들’의 업무방해 ‘요지경’),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못할 노인의 머리에 물대포를 직사해 쓰러뜨린 후에도 줄곧 물대포를 퍼부어대던 경찰공무원들 등등등


국민 기본권 보장과 법치주의 유지의 중요한 기제 중 하나인 직업공무원 제도가 이렇게 형해화되는 동안, 전문가 그룹도 붕괴하고 있다. 법치주의와 국가형벌권 실현의 주된 기제라 할 검찰의 타락이야 말하면 입이 아픈 상황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 그런데 전문가 그룹의 추락을 극적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등장했다. 백남기 농민 사인을 병사(病死)로 판단한 서울대 의대 백선하가 바로 그 사람이다.


백남기 농민의 수술을 집도했던 백선하는 3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 서성환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의사협회 지침에는 심폐 정지, 심부전과 같은 사망의 양식을 기록할 수 없다고 돼 있는데, 고 백남기씨는 의사협회에서 규정한 경우와 다르다”, “만약 최선의 치료를 하고도 사망에 이르렀다면 (나도) 사망 종류를 ‘외인사’로 썼을 것”, “고인의 가족들이 체외투석치료 등에 반대해 최선의 치료가 이뤄지지 못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병사’ 고집한 주치의 “적극적 치료 안받아 병사” 궤변) 백선하의 주장인즉슨 백남기 농민이 급성 신부전으로 인한 심폐정지로 사망했는데, 급성 신부전을 막기 위해서는 체외투석치료를 했어야 했는데 이를 못하게 유족들이 말려서 백남기 농민이 충분한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해 숨졌기 때문에 병사라는 것이다.


백선하의 논리대로 하면 총에 맞아 죽어도, 칼에 찔려 죽어도, 차에 치여 죽어도, 물에 빠져 죽어도, 독극물에 의해 죽어도 최선(?)의 연명치료가 없었으면 모두 병사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연명치료에 동의하지 않은 유족들은 고인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보다 쉽게 말해 백남기 농민의 죽음에 물대포를 쏴 백남기 농민을 거의 뇌사 상태로 만든 경찰이 아니라 연명 치료를 거절한 유족들이 책임이 있다는 것이 백선하의 논리가 이르는 결론이 된다.


이런 논리, 이런 상상, 이런 언어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인간의 논리가 아니고, 인간의 상상이 아니고,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백선하는 자신의 이름만 욕되게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입장이나 사사로운 감정, 온갖 이해관계로부터 독립해 특정한 사건이나 사안에 대해 고도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전문가 그룹 전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민주주의는 결함이 많은 제도다. 뛰어난 리더가 집권해도 큰일을 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형편없는 사람이나 악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해도 나라를 말아먹는 걸 막기에는 제법 그럴싸한 제도다. 물론 전제조건이 있다. 직업공무원들과 전문가 그룹이 헌법과 법률과 사회적 양식이 부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경우라는 조건 말이다. 만약 공무원들과 전문가 그룹이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제아무리 박근혜가 청와대에 있다 해도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건강한 항체가 많으면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근육만 불거진 약골에 불과하다.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도 기고한 컬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