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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야권에 쏟아진 축복이자 저주

이태경 프로필 사진 이태경 2017년 04월 01일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처장 / 칼럼니스트

역사라는 세찬 물줄기 앞에 한 인격의 영향력은 보잘 것 없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박근혜를 보고 절감한다. 단언컨대 박근혜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국면은 결코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근혜의 집권 기간을 관통하는 정치·경제·사회·외교·남북관계 등의 총체적 실패와 누적된 실정이 특권과두동맹((재벌을 정점으로 보수정당, 고위관료, 사법권력, 검찰, 비대언론, 종교권력 등으로 구성된 지배 카르텔)의 정치적 호민관이라 할 보수정당의 집권 가능성을 낮춘 건 맞다. 야권 입장에서 최대의 행운이었던 건, 뒤집어 말해 보수정당 입장에서 최대의 불행이었던 건, 박근혜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블랙홀을 열어젖혔고, 모든 것이 거기로 빨려들어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블랙홀의 등장으로 보수정당의 정권재창출 가능성은 극적으로 희박해졌다. 그런데도 박근혜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몰랐다. ​만약 박근혜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초기에 사임했더라면, 국회의 탄핵소추의결 전에 사임했더라면, 특검의 조사에 성실히 응한 후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결정 전에 사임했더라면, 마지막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 직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온갖 종류의 친박들에게 해산을 명령하면서 죄값을 치르겠다고 선언했더라면 정치지형은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근혜는 자신의 사법처리 가능성을 높이고, 보수정치세력의 재편기회를 봉쇄하는 방향으로 일관되게 움직이고 결정했다. 도대체 박근혜는 왜 자신의 무덤을 파고, 보수정치세력의 목을 조르는 일련의 선택들을 내린 걸까? 아마도 박근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고 청와대의 주인이다. 나는 사심(私心)없이 공심(公心)만 있는 사람이며, 결백하다. 따라서 사임은 가당치 않다. 탄핵은 기각될 것이다. 형사소추 및 처벌은 불가능하다'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의 어리석은 선택들을 이해할 길이 없다.


​박근혜에게 최소한의 분별력과 객관화 능력이 있었더라면, 박근혜에게 보수정치세력과 지지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과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박근혜가 정국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긴 분별력과 객관화능력이 있는 박근혜, 보수정치세력과 지지자들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있는 박근혜가 박근혜일 수는 없다. 자신 이외에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박근혜야말로 야권에 쏟아진 벼락 같은 축복이자, 보수진영에 내려진 천형이다.


​​문제는 박근혜 다음이다. 야권이 박근혜를 딛고 집권은 가능하겠지만, 박근혜에 기대 성공적인 통치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박근혜의 실정과 헌정유린에 대한 유권자들의 분노가 사그라들고, 유권자들의 눈이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할 때 정권을 담당한 자들의 책임은 무한대다. 가뜩이나 이명박과 박근혜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에는 난제가 첩첩산중이다.


언뜻 헤아려봐도 경제성장률의 둔화, 저출산 및 고령화, 극단적인 자산 및 소득의 양극화, 사드 배치로 상징되는 동북아 정세의 급변, 북핵사태로 표현되는 남북 간의 격렬한 대치 등등의 난제들이 차기 정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어떤 현안도 해결하기가 지난하다. 솔루션도 명확치 않고,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며, 통제되지 않는 변수도 등장하고, 갈등이 첨예할 것이며, 시간도 많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권을 책임진 사람들이 이명박, 박근혜 탓을 하거나 대외적 어려움을 변명할 수도 없다. 나라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건 핑계가 아니고 책임과 능력이기 때문이다.


안팎으로 어려움에 휩싸인 채 출발할 차기 정부의 앞날이 가시밭길일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박근혜는 야권에 쏟아진 축복이자 저주다. 박근혜가 정권교체의 일등공신이자, 성공적인 국정운영의 최대 걸림돌일 것이기 때문이다.